정주영 탈경영/경제대통령 실패한 「왕회장」의 귀거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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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형 프로젝트 움직임이 정치권 심기 건드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3일 짤막한 회견을 끝으로 그룹 경영에서도 은퇴했다. 현대그룹의 창업주로 몸을 일으켜 마침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도저했던 풍운어린 삶을 서산농장에서 마감하겠다는 그의 귀거래사는 재계는 물론 우리사회 전반에 적지않은 파문과 반추를 던지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누가 뭐래도 이 나라가 배출한 탁월한 경제인이었다. 울산 모랫벌에 거대한 조선과 자동차 왕국을 일궈낸 과정은 60년대 가발과 섬유로 명맥을 이어가던 우리 경제를 중공업국으로 한단계 도약시키는 견인차였다. 그러나 정씨는 그가 벌였던 「마지막 잘못된 승부」에서 지면서 지난날 기업인으로 쌓아올렸던 명예조차 일순간에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재계 총수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재력을 바탕으로 정권까지 잡아보려했던 14대 대통령선거 출마가 그것이었다.
기업경영이나 국가경영이나 다를게 뭐냐는 그의 야심은 그동안 여러정권하에서 경제인으로 겪어야했던 개인적인 상처나 손실을 한꺼번에 만회하면서 현대의 「왕회장」에서 「경제대통령」으로 변신하려는 「과욕」이었다.
그는 그러나 과정에서도,결과에서도 실패했다. 정치의 세계에서 그가 밀고나간 경제적인 접근방식은 통하지 않았다.
그는 우선 정치와 경제를 구분하지 못했다. 국민당을 마치 현대그룹처럼 「경영」했고,현대그룹의 인력과 자본을 무작정 선거에 끌어들였다.
특히 14대 총선에서 국민당이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단독교섭단체 구성에 성공하는 등 약진을 보인데 한껏 고무된 정 명예회장은 대선에 그의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들었다. 평생 치밀한 「계산」에서 실패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던 그는 선거일 직전까지도 대통령 당선을 장담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에는 프로였지만 정치에는 아마추어였던 한계를 정씨는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정치판의 속성상 그에게 남은 것은 끝없이 치러야하는 「대가」였다.
그는 물론 현대그룹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선거직후 정부에 협조를 바라고 화해를 요청하며 경제인으로 복귀하려했던 그의 남은 희망부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작년 10월의 대통령선거법 위반 유죄판결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현대그룹은 대선후 2년간 유형무형의 제재를 받고 있다. 산은 등이 창구인 장기시설 자금대출은 여전히 봉쇄돼 있으며,국내외 기채나 해외투자 역시 다른 그룹에 비해 어렵기만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그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최근까지 몸부림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광양제철소 등 과거의 명성에 걸맞은 대형 프로젝트도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움직임이 오히려 권력핵심의 심기를 더 건드렸고,결국 3일의 갑작스런 기자회견으로까지 상황을 몰고 간 것으로 알려졌다. 『시련은 없어도 실패는 없다』는 제목의 그의 자서전도 결국 실패로 끝맺은 셈이다.<손병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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