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달만의 총리경질(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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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회창씨가 불과 넉달여만에 총리직을 물러난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는 과거 「얼굴마담」이니,대독총리니 하는 말을 듣던 역대 총리들과는 달리 소신을 갖고 내각의 구심역할을 했으며 각종 어려운 국가현안에 대해서도 능력과 합리성을 보여주었다. 모처럼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는 총리가 나왔다는 기대가 있었는데 넉달만에 물러났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총리경질이 지극히 돌발적으로 이뤄지고,더욱이 다른 이유도 아닌 정책결정방식에 대한 청와대와의 이견 때문에 이 전총리가 사임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총리경질은 총리 혼자만이 아니라 곧 총리가 제청한 전각료의 총사퇴와 형식상 새로운 조각을 한다는 뜻으로 엄청난 국가대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이 돌연 전격적으로 처리되는 것은 전체사회에 큰 충격을 줄뿐 아니라 국정의 안정적 추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 문제가 된 정책결정방식을 둘러싼 갈등도 우리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통일·안보정책의 결정과정에서 총리가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총리를 거쳐 대통령이 최종 결심하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일 것이다. 다만 이 전 총리가 대통령 지시로 구성된 통일·안보정책 조정회의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것은 원만하지 못한 처사였다. 정부의 제2인자로서 정책결정 구조에 문제가 있다면 내부적으로 조정·개선하는 노력을 먼저 하는게 옳았을 것이다. 공개적인 도전으로 느껴지면 대통령으로서도 어떤 조치가 불가피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이 전 총리의 지난 21일 발언이 나온 배경이나 그동안의 불화와 갈등에 대해서는 소상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정부가 내부적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총리의 전격 경질에까지 이른 것은 정부에 대한 신뢰에 적잖은 손상을 줄 수 밖에 없다.
이번 일은 결국 직선대통령제하의 총리역할이 뭣이냐는 문제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자칫하면 바지저고리가 되고,적극적으로 나서면 청와대와 부닥치게 된다. 결과적으로 김 대통령은 이 전 총리형의 「적극총리」에는 제동을 건 것으로 풀이되는데 이런 의지의 표출이 다시 총리와 내각의 무력화로 나타나서는 곤란하다. 우리 헌정의 독특한 형태인 이 제도의 취지를 살려 정부 전체의 팀웍을 유지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총리의 일정한 역할은 정책의 혼선으로 막고 대통령의 부담을 완화시키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번 총리경질 파동은 김 대통령에게도 정치적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인사가 만사라고 강조해온 대통령이 1년2개월만에 세번째 총리를 임명하게 되고,넉달만에 다시 개각을 하게 됐으니 부담이 안될 수 없다. 빨리 뒤숭숭한 요소를 정리하고 국정의 안정적 추진태세를 확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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