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初 대통령배 야구 경북고 신화 주역 남우식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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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해마다 대통령배가 열릴때면 20여년전 마운드에 섰던 기억이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70년대 초반 무적 경북고 신화의 주인공 南宇植씨(41).
南씨는 70년 제4회,71년 제5회 대회에서 잇따라 최우수선수상을 받으며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2학년이던 4회대회때엔 우승을 놓치는줄 알았어요.5회까지 동대문상고에게 4구 2개만 허용하며 완벽한 투구를 했으나 6회들어 컨트롤 난조로 4점을 내줬거든요.』그러나 경북고는 남우식의 피칭이 되살아나면서 타격도 활발해져 7회 1점,8회 3점을보태 6-4로 재역전해 우승컵을 안았다.
이 대회에서 남우식은 4할6푼2리의 타율로 타격상까지 휩쓸었다. 이듬해인 71년 결승전은 경북고 남우식과 부산고 金貞洙의투수전으로 팽팽히 이어진 끝에 3회말 孫相大의 스퀴즈로 1점을뽑아낸 경북고가 또다시 정상에 올랐다.
南宇植을 비롯,千普成.裵大雄.鄭鉉發등 스타 플레이어들이 포진한 당시 경북고의 위세는 하늘을 찔러 71년엔 대통령배등 6개전국대회에 출전,모두 우승하는 신화를 만들었다.
鐵腕 남우식은 마운드를 도맡아 지키면서 강속구와 예리한 커브로 상대 타자들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경기전 머리를 감지 않고 손톱도 깎지 않았다는 南씨는『선수들의 기량을 한군데로 모은 당시 徐永武감독의 뛰어난 통솔력이 우승의 원동력이었다』면서 87년5월 뇌졸중으로 54세에 타계한 徐감독을 떠올렸다.
영원히 건재할 것같던 남우식도 역시 인간이었다.
그는 경북고 졸업후 한양대에 진학했으나 3학년때 어깨 고장으로 슬럼프에 빠진뒤 롯데(아마)-星武(공군)를 거치면서 예전의기량을 찾지 못해 많은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프로야구 출범 직전인 81년 1월 그는 16년간 입었던 땀에전 유니폼을 벗고 롯데햄 특수판매과 사원으로 새출발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운동선수 특유의 추진력을 지닌 그는 회사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지금은 롯데햄 수원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姜甲生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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