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과 독립신문(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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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현대적 개념의 호구조사가 이뤄진게 갑오개혁 이후부터였다. 한말인 1903년과 1906년 두차례에 걸친 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한성부 인구는 19만2천3백4명이고,가구수는 4만2천7백30가구로 나타나 있다.
1896년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이 전성기를 이루던 1898년에는 그 발행부수가 3천부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3천부란 지역단위로 발행되는 구정신문 부수도 못되지만 4만여가구에 20만 인구인 서울의 당시 사정으로 본다면 놀라운 발행부수다.
또 당시는 지금과 달리 한 사람이 읽고 휴지통에 버리는 신문이 아니라 집집마다 돌려가며 꼼꼼히 읽고 시장에서 크게 낭독까지 했다하니 열독률로 치면 1부가 2백명 정도의 독자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발행부수 3천이라면 적어도 수십만명이 독립신문을 돌려 읽었다고 볼 수 있으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을까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신문의 책임자는 서재필,부책임자는 한글학자 주시경이었고 그 밑에 탐방원이라는 기자를 두었다. 정동의 본사외에 인천·원산·부산·파주·개성·평양·수원·강화 등지에 지국을 두어 전국지로서의 영향력도 지녔다.
배달방식은 배달과 우송을 병행했고 여기에 서울에서는 가판제까지 도입했으니 현재의 신문 운영방식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창간 당시는 1부에 1전씩 받았으나 당시 신문제작비가 1전6리여서 1부를 발행할 때마다 6리의 적자를 봤다는 계산이다. 이 때문에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으로 받는 봉급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고 주필 월봉 1백50원은 고스란히 신문제작비에 들어갔다.
독립신문 지면은 광고와 논설로 이뤄진다. 광고란 요즘식 뉴스나 동정란이며 논설은 독립신문의 주의 주장을 역설한다. 독립신문 논설에 나타난 주의 주장을 보면 나라의 독립,이를 지키기 위한 개개인의 애국심,국가에 대한 충성이 가장 크게 강조되고 있다. 그 다음이 부국과 개화를 위한 교육,민주주의 정신,사회관습의 개혁,산업개발과 관료의 부패 규탄 등으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개혁과 다를바가 없다.
나라의 명운이 풍전등화의 긴박한 위기에 처했던 한말 한 언론인으로서,한 시대의 개혁파로서 서재필이 주장하고 실천했던 일들이 1백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환경속에서 비슷한 형태로 요구되고 있음은 역사의 기구한 운명인가. 그의 유해가 40년만에 고국에 돌아오고 독립신문 1백주년을 기념하는 모임이 생겨났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느끼는 감회가 그래서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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