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소설>최인훈 "화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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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독일이 통일되고 동구권이 개방되고 소련이 해체된 80년대 말이후 우리문단이 고수해온 사실주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시대최인훈씨는 지난 한세기의 우리역사를 되돌아보며 이념과 인간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20년만에 최근 최씨가 펴낸 장편 『화두』(민음사刊)는 전통소설에 익숙해온 독자에게는 낯설음과 때로는 지루함까지도 안겨주는 특이한 소설이다.
얼핏 수필이나 철학적 산문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분석적이어서 소설이 지닌 극화의 재미를 느낄 수 없지만 바로 그런 소설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작품속에 암시되어 있고 그것이 설득력을 지니기에 성공한 실험이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작가의 분신이면서도 허구화된 「나」다.그러나 주인공은 엄밀히 말해서 「나」라기보다 「시간」혹은 「기억」이다.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그것은 실체를찾아가는 「나」의 긴 여정인데,그 통로가 바로 우리 역사요,시간이요,「되돌아 봄」이라는 행위다.그리고 그 역사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체험과 기억과 뗄 수 없이 하나다.
서술은 어린 시절 북쪽에서 그가 체험한 H시와 W시에서의 경험으로 시작된다.
글을 쓰는 현재의 욕망에 간섭과 지배를 받으면서 회고되는 과거는 곧이어 1987년 봄 미국으로,다시 1974년 미국에서 겪는 긴 이야기로 옮겨지며 구석구석에서 풀어져나가고 드디어 1989년으로 이어진다.그가 본 현재의 소련과 어릴 적 기억속에있는 소련,그리고 비행기안에서 읽은 레닌의 모순된 운명은 그가왜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지를 암시한다.
그는 자신을 지배해온 풀 수 없던 질문에 열쇠를 얻은 것이다.그의 가족이 H시에서 W시로,남한으로,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긴 피난의 길에 오른 이유는 무엇이었던가.해방이 되자 찾아든 소련군,들이닥친 미군,그 사이에서 목숨을 부지하려 는 개인이 선택해야했던 진실은 무엇이었던가.W시에서 겪은 지워지지 않는 하나의 원기억,「나」의 되돌아봄은 그것을 맴돌며 첩첩이 쌓인다. 『낙동강』에 대한 감상문을 극찬해 주던 작문선생님과 내글을문제삼아 자아비판을 ■게 했던 지도원 ,똑같은 내글에 대한 해석은 왜 그리 달랐던가.
하나는 축복받은 소명의식이요,다른 하나는 늘 위협받아야했던 현실이었다.그리고 이 두개는 각기 모순의 진리로서 줄곧 그를 따라다닌다.
그는 삶의 긴 여정을 통해 실체란 시간에 따라 변모하고 인간은 얼마나 불안정한 존재인지 깨닫는다.그리고 신이 죽은 시대에들어선 유일한 이성은 혁명이 아니요,되돌아보는 시선이고,그것은체제도 이념도 아닌 너 자신이 신의 역할을 대 신해야 한다는 준엄한 결론에 이른다.
레닌의 마지막 운명에 접하면서 인간의 슬픔은 진화때문이 아니라 그 진화가 언제든지 회수가능하며 불안정한 것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독자는 가슴이 아파진다.현실 뒤에 도사린 권력을 봄으로써 예술이 승리하고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해 존엄성 을 찾는 소설.그래서 그는 꼼꼼히 자세히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권택영(문학평론가.경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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