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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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길고 긴 겨울(39)길남이 조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뭐 걔한테 할말이 있어요.그냥 듣고만 있었지요.』 『뭐가 어째? 듣고만 있었다구? 난 네가 그애에게 뭐라고 했나 묻고 있어!』 『그냥… 그런가 보다,도망치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구나 했지요.』 『뭐 어째? 이놈 자식,아가리를 그냥 확 찢어놓을까 보다.그래서? 네입으로,도망치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그런 말을 했다는 거냐?』 『아니,아저씨는 사람을 어떻게보고 하시는 말씀이세요.제가 한두살 먹은 앤 줄 아세요.』 길남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냥… 안 들은 거로 하겠다.난 네가 도망치겠다는 말은 들은 적도 없다,그래 버렸지요.』 『정말이겠지?』 『절 못믿으시겠다 그거예요,지금.』 잠시 말을 끊고 명국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국이 어금니를 악물었다.기와 한장 아끼다가 대들보 썩인다는 말이 있지.이 일에는 경중이 분명해야 한다.버릴 건 버리고 챙길 건 챙기고,매사에 못질을 해도 아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런데,이게 무슨 지랄같은 소린가.비루먹 은 강아지 같은 성식이 놈마저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다면,이거야말로 큰일 아닌가.그놈이 만약 먼저 일을 저지르기나 한다면,얘나나는 또 언제까지 여기서 썩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 자식이 왜 너한테 그런 말을 한 거냐?』 『여기 그냥 있다가는 몸도 약하고,지레 죽을 거만 같다면서 한 소리예요.』『그냥… 답답해서 하는 소리더냐?』 『제 느낌에는 뭐랄까.일을치기는 칠 거 같았어요.자기가 도망가고 나면 남아 있는 우리들이 괜한 고생을 할텐데.그런 소리까지 했거든요.』 명국이 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만한 년은 제 서방 굿도 못 본다더니… 우리가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일이 아닌 거 같구나.』 『제 생각도 마찬가지예요.』 『문제는 말이다.그놈이 무슨 냄새를 맡은 거나 아닌가 그게 걱정이다.혹시 그놈이 왜놈 앞잽이 끄나풀이나 아닌지,속을떠보려고 한 소리나 아닌가 그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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