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의 무조건 통과는 “옛말”/“실명제 시행안 모법과 맞느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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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 총리 첫 제동… 재검토 지시
28일 오후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이례적인 일이 하나 일어났다. 부처가 올린 법안에 대해 국무총리가 직접 문제를 제기해 통과를 보류시킨 것이다. 대개 고속통행이 상례인 이 회의에 빨간 신호등이 작동한 것이다.
재무부는 이날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 경제명령중 금융거래정보의 비밀보장을 위한 시행규정안을 올렸다. 이 안은 이미 2월24일 부총리가 주재하는 경제장관회의를 거친바 있어 순조로운 의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번째 안건으로 이 안이 상정되자 이 총리는 먼저 비밀보장 대상의 범위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했다. 재무부는 금융거래의 내용(액수나 예금종류)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금융기관과 금융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까지 범위에 넣는 것으로 규정안을 만들었다.
이 총리는 이 조항이 「금융거래의 내용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비밀보장대상으로 정한 모법(긴급명령)과 맞느냐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거래사실」까지 포함시키는 것은 너무 포괄적이지 않으냐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총리는 홍재형 재무장관과 황길수 법제처장에게 물었다. 재무부는 모법의 「내용」이란 표현은 당연히 「거래사실」까지를 포함한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만들었다. 그러나 홍 장관은 별로 이 논지를 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검토해보겠다』고 뒤로 물러섰다. 황 처장도 이론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 총리는 차제에 동의서의 유효기간도 다시 검토해보라는 뜻을 밝혔다. 재무부는 금융거래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제공할 때 고객에게 받는 동의서의 유효기간을 6개월로 정했는데 이 총리는 경우에 따라 이 기간이 길수도 짧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들어 수사가 다 끝났는데도 유효기간 때문에 정보가 계속 공개될 수 있거나 거꾸로 그 기간 때문에 장기수사가 벽에 부닥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 총리는 국무회의 이틀전인 26일 오전 시행규정안을 보고받은후 일요일 공관에서 이를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이 총리의 문제제기를 보통 있을 수 있는 「한 국무위원의 의견제시」로 볼 수도 있다. 또 그가 대법관과 감사원장을 지낸 만큼 법률적인 문제에 있어선 다른 국무위원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록 시행령의 자구이기는 하나 이렇게 총리로부터 제동이 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관계장관들이 시행령 하나하나까지 좀더 깊은 공부를 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각부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치러내야 할 시험이 과거보다 좀더 까다로워진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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