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산업 경쟁력 우선돼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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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의 대아시아 금융시장 개방요구가 호놀룰루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APEC) 재무장관 회의에서 분명하게 표출되었다. 홍재형 재무장관은 미국과 약속한 스케줄대로 6월부터 중소기업 발행 전환사채(CB)를 개방하는 한편 외국인 주식투자규모도 단계적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중소기업 CB시장이 개방되었다고 해서 당장 큰 일이 나지는 않는다. 중소기업의 CB 발행규모가 워낙 미미한데다 외국인이 별로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상징적인 개방조치라 해도 이는 외국인 투자가가 원하는 대기업 CB시장의 개방을 예고하는 것이다. 미국은 다른 아시아국가에도 금융시장 개방요구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데 우리는 미국의 명분을 세워주되 충격을 덜 받는 부문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중소기업 채권시장의 개방보다는 외국인 주식투자 규모가 늘어나는 것이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더 충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홍 장관은 구체적인 증액규모나 시기를 못박지 않고 올 하반기부터 내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종목별로 10%로 제한된 외국인 주식투자가 우리 증시에 미치는 충격을 감안하면 매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여기서 하나하나씩 금융시장 개방에 불안을 느끼기 보다 이 시점에서 신경써야 할 문제는 우리가 과연 금융시장의 경쟁력을 키우고 있느냐다. 결국 개방을 하고 안하느냐는 우리 마음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어떤 준비를 하면서 어떻게 개방하느냐 하는 우리 노력여하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부가 의도적으로 금융시장과 주식시장에 개입해 시장이 자생력을 키우지 못하고,금융기관들은 경쟁력이 취약해지면 외국인 투자가나 금융기관의 경쟁에서 질 것은 자명하다. 이미 외국인 투자가의 주식투자 수익성은 국내 기관투자가들에 비해 월등히 높아 규모의 제한만 없으면 우리 증시는 외국인 투자가들에 의해 등락이 결정될 정도다.
국내 주식시장의 자생력은 우리의 금융기관들과 증권회사 등의 능력에 좌우된다고 보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이들 금융기관의 자생력을 키워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키울 것인가로 집약된다. 정부 일각에서는 금융전업군 육성 등의 대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딜레마가 해결되리라 보기는 어렵다. 정부는 책임경영을 통해 정부 간여를 줄이고 합리적인 경영풍토를 조성하는 과제와 「주인있는 경영」의 강조에서 오는 대기업 집중이란 문제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간이 촉박한데 언제까지 주저만 하고 있을 것인가. 금융산업을 제대로 경쟁력있는 산업으로 육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외부에 의해 타율적인 개방요구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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