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팅열전>진부화정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과거 춥고 배고팠던 시절에도 양복만큼은 유행때문에 새로 사지,떨어져서 새로 사는 품목은 아니었다.
칼러깃이 좁아졌다가 늘어났고,바지주머니가 옆에 붙는가 하면 어느새 앞으로 와있고,단추도 두개.네개.여섯개씩으로 바뀌고….
양복 입을만큼의 수준이라도 되니까 이같은 유행이 가능했는지는몰라도 아무튼 양복은 우리 국민들에게 덧씌워져 있던 절약과 검소라는 체질을 벗겨낸 첫 품목이었던 것 같다.
요즘들어서는 양복은 물론 여자옷.아이옷등 옷종류라면 모두 유행을 타고 심지어 장난감.가전제품.가구등 웬만한 제품 대부분이유행에서 벗어날수 없게 돼있다.
산업발전에 따른 풍족한 생활과 선택이 가능한 소비활동,매스컴의 발달,좀더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또 남들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는 인간의 심리등이 한데 어우러지다보니「유행이 유행이 돼버리는」세상이 온 셈이다.
게다가 기존 상품에 대한 교환수요만으로는 기업존속이 어렵다보니 끊임없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내려는 기업들의 마키팅전략,이른바「진부화 정책」도 한몫하고 있다.
여기에는 전자제품들처럼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거나 좀더 앞선 기술의 개발로 자연히 新제품이 舊제품을 밀어내는「기능적 진부화」도 있지만 패션이나 화장품과 같은「계획적 진부화」도 있다.
예컨대 화장품의 경우 各社가 지난봄에는「에버그린」,여름엔「UV화이트」,가을에는「밍크브라운」을 내놓았고 올봄에는 일제히「트로픽 오렌지」「스칼라 오렌지」하며「오렌지」라는 색조화장품을 동시에 내놓고 있다.이 때문에 화장품 회사들은 간혹 「담합」이라는 의혹을 받기도 하지만 화장품 회사로서는 사실 어쩔 수 없다.해마다,계절마다 유행을 다르게 하지 않으면 모두들 있던 것을쓸 뿐이고 이렇게 되면 적자는 불보듯 뻔한 일이다.아울러 소비자들이 제각기 취향과 개성에 따라 각 각 다른 제품을 쓸 경우기업들이 各매장에서 유지해야 하는 품목수도 늘어나기 때문에 결국 이에따른 재고.물류.관리비용을 줄이려면 유행을 일으켜 품목수를 축소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李孝浚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