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의 투혼(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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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프로기사 조치훈은 한일 양국의 바둑계에서 똑같이 미묘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쪽에서는 그가 「한국인 기사」임을 강조하고 있으며,일본쪽에서는 그의 바둑이 「일본바둑」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어느쪽도 틀렸다고 할 수 없겠으나 그 때문에 그가 겪어야 하는 갈등이나 외로움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관련한 흥미있는 사례가 있다. 80년대 중반쯤의 일이다. 당시 일본의 권위있는 바둑잡지가 기사들을 동원해 바둑의 「세계 베스트10」을 선정한 일이 있었다. 응답자들은 예외없이 1위에 고바야시,2위에 조치훈,그리고 다케야마·오타케 등을 상위에 올려놓은 다음 조훈현과 임해봉·섭위평 등 중국 기사들을 하위로 내려놓았다. 한국의 바둑잡지가 이에 맞서 발표한 랭킹은 1위에 조훈현,2위에 임해봉,3위에 조치훈이었고 그밖에 일본·중국 기사들이 골고루 분포된 다음 10위가 서봉수였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이 조치훈의 위치였다. 당시 여러 기전에서 고바야시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아직까지 일본바둑의 최강자였기 때문이다. 한·중·일 3국간의 바둑교류가 원활하지 않은 때였던 만큼 객관적 실력평가가 어려울 수는 있겠지만 일본에서 2위,한국에서 3위로 평가된 것은 그 무렵 그의 종합성적으로 볼때 다소 부당한 측면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조치훈은 그같은 「한국인 기사」와 「일본바둑」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은 일이 없지만 바둑이 「정신력의 싸움」이라는 측면을 감안한다면 그것이 한국인으로서 일본기사들과 싸우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어려우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아닌게 아니라 80년대 중반이후 그의 바둑은 전성기로부터 다소 내려앉는듯한 양상을 보여 국내 바둑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더구나 86년에는 그가 가지고 있던 일본 최대의 「기성」 타이틀마저 동문이며 영원한 숙적이기도 한 고바야시에게 빼앗기고 7년동안 번번이 도전에 실패했으나 그의 우울한 심회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것이 기사들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내부의 적」 가운데 하나라면 그가 8년만 되찾은 「기성」 타이틀은 그 비중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적」을 극복했다는데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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