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공이산」의 국가전략(유승삼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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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통령직을 걸고…」란 연설문 작성자가 누구냐는 것은 쓸데없는 논란이다. 연설문을 누가 썼든 김영삼후보의 입을 통해 그것이 공표된 이상 그 말은 어디까지나 김영삼후보의 말이지 연설문 작성자의 것은 아니다. 더구나 1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그것을 문제삼는다는 건 대통령의 민망함을 덜어주려는 제스처이거나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난데없는 연설문 소동
누가 한미 정상회담때 쌀시장 개방문제 거론을 피하도록 건의했는가 하는 논란도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쌀기장 개방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는건 분명 잘못이지만 누가 그렇게 건의한 것이든 책임이 있다면 그것 역시 대통령이 져야 한다.
문제의 초점은 누가 연설문을 작성했고 누가 정상회담때 쌀문제 논의를 피하도록 건의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연 현재의 참모진·내각,더 나아가서는 현 정부의 국가경영 능력은 충분하며 국가경영전략은 있는가 하는데 있다.
대선때의 연설은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표나 긁어모으고 보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치더라도 최근의 한미 정상회담 때조차 쌀문제 거론을 피한 것이 소문대로 「모든 준비가 다 돼있다」는 판단에서 한 것이라면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안이한 판단력으로 이제 둑을 넘어 밀어닥칠 UR 파고를 어떻게 감당해낼지 걱정이다.
쌀문제가 초점이 돼 있으나 다 알다시피 UR 문제는 쌀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쌀문제가 중간 예상보다는 좋은 조건으로 합의되자 국민 무마용인지는 모르나 정부 고위층 사이에선 금세 희색으로 감돌고 낙관론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따져봐도 승자는 우리가 아니라 미국이다. 결코 웃을 때가 아닌 것이다.
우리들은 너무 쉽게 비관론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또 너무 쉽게 낙관론에 젖어들곤 한다. 이는 곧 우리에게 장기전략이 결여되어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국가적 전략이 뚜렷하고 그에 따른 단계적 전략·전술이 치밀하게 마련되어 있다면 작은 변화 때마다 크게 일희일비할 까닭이 없다. 국가적 전략을 그대로 추진해나가면서 그때 그때의 변화들은 담담히 단계적 전략·전술에 흡수해나가면 그 뿐인 것이다.
○단기적 성과에만 급급
UR문제는 이미 5공시절에 제기된 것이다. 그때부터라도 차근차근 대비해왔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당황과 충격은 없었을 것이다. UR가 아니라 USR라는 말이 있듯 미국은 정권에 관계없이 이미 10년전부터 자국의 이익추구를 위한 국가전략을 추진해왔지 않은가. 물론 미국이 대국이고 강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면도 있으나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유럽국가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EC 통합 등으로 미국의 국가전략에 대응해왔다. 작고 약한 나라도 나름대로의 국가전략은 있는 법이고 또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쌀문제를 비롯한 이번 UR문제를 계기로 정부가 서둘러야 할 것은 장기적 국가전략을 수립하고 이제부터라도 그에 따라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그래야 처변불경할 수 있고 국력도 결집시킬 수 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 개혁을 추진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청사진을 내놓을 것을 요구한 것도 그러한데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새정부는 과거에 대한 문책에는 과감한 면도 보여주었으나 미래에 대한 대처는 다분히 즉흥적·임기응변적이었다.
장래에 대한 생각없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부모는 없다. 진학할 때는 그때마다 자녀가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저울질해 진로를 결정한다. 우리들의 머리속에는 먼저 자녀의 장래를 위한 장기전략이 들어있는 것이다. 또한 자녀를 과학자로 만들고 싶다고 해서 그것이 한 두해에 가능한 일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고 그것은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를 거쳐 차근차근 장기간에 걸쳐 준비해 나가야 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나라살림이라고해서 다를바는 없을 것이다. 국가발전도 장기적인 전략 아래 「우공이산」의 끈기로 대비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또 하나 부족한 것이 바로 이 우공이산의 국가경영이다. 역대 정권은 당장 효과가 나는 것,그것도 가시적 성과를 얻는데만 급급해왔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역대 정권들이 하나같이 정통성을 지니지 못해 나라의 내일보다는 정권의 오늘이 더 다급한 과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장기전략부터 세워야
그러나 새정부는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 대통령임기도 단임제여서 다음선거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어떻게 하면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대통령으로 남느냐만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꼭 임기안에 무엇을 매듭 지으려는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열매가 10년,20년뒤에 맺어질지라도 그것이 국가발전에 필요한 일이라면 오늘 씨를 뿌리는 것이 우공이산의 정신이다.
지금 민심이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급한 것은 단기적 처방이 아니다. 이때야말로 국가가 장기전략을 내놓을 때이고 이 기회에 참모도,내각도 그런 장기전략을 짤 수 있고 인기에 상관없이 그것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성실하고 현명한 「우공」들로 개편해 새출발해야 한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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