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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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제1부 불타는 바다 어머니,어머니(43) 그렇지만 어머니,전여기 와서 안 건데… 왜놈이라고 모두 그렇게 한 통속만은 아니었거든요.조선에 나와 있는 왜놈들 보다는 여기 와서 만나는 사람들이 오히려 나았거든요.요시코도 있잖아요.어머니.
네가 큰일이구나,제 목숨 부지하자고 기를 써도 뭐 한 마당에,하찮은 요시코인지 뭔지가 눈에 보이더냐,젊은 것도 병이로구나. 욱신거리며 쑤셔오는 턱과 아직도 부어올라서 두툼한 입술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지상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럴지도 모른다.내가 이 땅을 바라보는 눈에는 요시코라는 너울이 씌워져 있는지도 모른다.내 눈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서 나는 이땅의 사람들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 날,지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공장으로 향했다.모래알을 씹듯이,밥알을 하나하나 세어가듯 그는 불편한 턱을 움직여아침을 먹었고,구령을 붙여가며 줄을 서서 공장으로 나갈 때는 가슴을 펴고 걸었다.
지상이 사무실에서 고바야시가 찾는다는 말에 숙사를 나선 건 그날 저녁을 마악 끝냈을 때였다.그는 징용공들의 노무관리를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무실에는 고바야시 혼자였다.그는 신혼으로,숙사 옆의 직원들사택에 살고 있었다.담배를 피우고 있던 그가 안으로 들어와 서는 지상에게 앉으라고 권했다.몇 번 사양하다가 자리에 앉는 그에게 고바야시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내가 출장 중에 일어났던 일이라,마악 들어와서 지금에야 알았다.몸은 괜찮나?』 지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사무실 안에서는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그와는.
『오카다에 대해서는 내일 아침 회의에서 사실경위를 묻겠지만,넌 특히 우리 사무실에 도움을 많이 주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서 무엇보다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문제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끝쪽 요시코의 책상을 지상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책상은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내일 공장으로 가기 전에 사무실로 들러라.서류를 올려야 하는데,조사는 내가 한다.』 밖으로 나왔다.공장을 둘러싼 담장을따라 지상은 천천히 걸었다.결국 저 사람은 일본인이고 나는 조선사람일 뿐이다.공장 담장이 끝나는 곳에서였다.자신을 기다리고있었던듯이 불쑥 다가서는 그림자가 있었다.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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