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본/“협력체” “공동체”안 싸고 대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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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APEC 주도권 잡기 경쟁 “불꽃”/아시아 시장개방 공략에 초점/미/아세안국 반발 등에 업고 냉담/일
미국 시애틀에서 열리고 있는 제5차 아태 경제협력(APEC) 각료회의의 최대관심사는 저명인사그룹(EPG) 보고서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엇갈리는 이해관계속에 회의시작전부터 각국이 물밑접촉을 벌이며 의견조정을 시도했으나 결국 일괄 채택의 유보로 매듭지어졌다.
알려진대로 저명인사그룹의 보고서는 APEC 진로결정에 있어 중요한 지침서로 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이것이 회원국 다수의 거부적인 반응으로 유보된 것이다.
EPG 보고서의 핵심은 지금의 「협력체」 성격의 APEC를 「공동체」 성격으로 바꿔 나가고,따라서 무역자유화의 진척속도도 더 가속화시켜 나가자는 것이다. 미국이 가장 적극적으로 이를 주장했고,호주 등이 지지했다.
그러나 동남아국가연합(ASEAN) 국가들의 반발이 의외로 강하게 먹혀들었다. APEC의 확대에 따른 ASEAN의 상대적인 위축을 우려하고 있을뿐 아니라,선진국들의 개방압력에 대한 저항적인 분위기 또한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여기에 더해 주목할 것은 일본이 이번 APEC 각료회담에 임하고 있는 태도다. 미국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APEC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일본은 거꾸로 전에 없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EPG 보고서의 채택에 관해 한국도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일본은 훨씬 더 노골적인 반발을 나타냈다. 채택을 강력히 희망하는 미국의 체면을 생각해 한국측이 다리를 놓아보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일본측은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특히 이번 APEC 각료회의가 UR협상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선언해주도록 희망하는 미국측의 요구에 일본은 전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요컨대 APEC의 흐름을 미국의 일방적인 주도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이 일본의 일관된 태도다. 어디까지나 APEC의 오너십은 일본을 비롯한 동양권이어야지,뒤늦게 뛰어든 미국측에 이니셔티브를 넘겨줄순 없다는 것이다.
일본이 하고 있는 또하나의 계산은 장차 미국이 요구해올 「일미 자유무역협정」이다. 여기에 대비해 미국이 요구할 카드는 가급적 내주지 않으려는 의도도 이번 APEC 회의에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일본 관계자의 설명이다. 결국 ASEAN 국가들의 노골적인 반발로 일본의 기본포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APEC 주변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이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미국측은 이번 시애틀 각료회담이 막상 시작되자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기세를 누그러뜨릴 수 밖에 없었다. 미국측이 APEC의 회의진행을 독단적으로 끌어갈 뜻이 절대 없음을 누누이 강조할 정도였다.
결국 이번 각료회의는 미국의 의욕적인 주도가 일본의 「조용한」 반발에 부닥쳐 고전을 계속했던 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미국과 일본간의 신경전은 19일부터 열리는 정상회담에서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미 하원에서 통과시킨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보다 강화된 입지를 배경으로 자유무역과 일본·아시아 각국의 시장개방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17일 밤 NAFTA가 하원에서 통과된 직후와 다음날 아침 시애틀로 떠나기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음 목표는 아시아 시장개방』이라고 연달아 강조했다.
이번 APEC 각료회담의 최대 관심사는 표면적인 협력관계 구축이나 실무적인 합의내용보다도 미국과 일본간에 벌어지기 시작한 주도권 싸움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은 바야흐로 새 세계질서 개편의 초점이 돼가고 있다.<시애틀=이장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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