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와 대담한 개혁발상(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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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융실명제는 어느 면에서 보나 국민모두의 경제거래 관행을 바꾸는 개혁적인 조치다. 따라서 민주정부하에서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시행된 실명제가 성공적으로 정착되도록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명제 도입을 원칙적으로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현재 정부가 취하고 있는 일련의 조치에 실망하고 있다. 살망이 쌓이게 되면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지 않게 되고,실명제 도입의 원초적 의의가 상실된다. 이렇게 되면 정부가 아무리 믿어달라고 호소해도 통하지 않는 것은 경제정책에 관한한 상식이다.
정부가 세제개편 내용중 일부를 앞당겨 발표하고,국민들의 불안감을 줄여보겠다고 실명제 보완책을 내놓았다. 핵심은 자금출처 조사와 세무조사로 인한 부작용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이제부터 안심하고 실명제에 동참하기를 기대하기에는 함량미달이다. 우리는 실명제 자체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으려는 정부노력을 나름대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 접근방법에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실명제가 개혁조치인만큼 정부가 개혁적인 발상을 통해 실명제를 정착시키는데 필요한 세제개혁과 금융개혁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국민들이 수십년 동안 불합리한 거래관행을 스스로 고쳐 개혁적인 조치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 정부 스스로가 어떤 개혁조치를 하고 있는지 충분한 준비도 안하고 옛날식대로 하면서 어떻게 국민들에게 개혁의 물결에 참여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신경제를 제대로 성공시키려면 민간의 창의력과 자발적인 참여를 극대화시켜야 한다. 시장기능을 효율화사키고,정부는 그 틀을 제대로 유지해 주기 위해 과감한 제도적 정비를 해야 한다. 실명제가 이같은 기본 방향에서 정착되려면 민간부문이 우선 정부를 믿어야 한다. 이번 보완책에서 나타난 정부의 인식과 태도는 그런 면에서 바뀐 것이 없다. 왜 이번 조치가 국민의 불신을 없애지 못할까. 국세청 관리의 선별적인 권한행사에 세금부담이나 재산권행사가 크게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장 불안한 것이다.
어째서 아직도 제도와 법을 통해 명백하게 선을 긋지 않고 정부가 개개인을 심사해 과거조사와 세무조사를 하겠다고 고집하는가. 왜 이 기회에 부부간의 상속·증여문제를 없애고 가족소득으로 바꿀 생각은 안하는가. 만약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사람을 굳이 조사하려면 달리 제도를 보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
과감한 세율인하와 금리자유화를 비롯한 금융개혁이 동반되지 않는한 정부의 개혁의지를 국민이 따르는데 한계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대다수 국민은 범법자가 아니고 나름대로 성실하게 사회발전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같은 국민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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