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생각없이 정한 러시아 함대 입항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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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오는 31일 사상처음으로 釜山港에 입항하는 러시아 태평양함대소속 함정3척의 입항일을 두고 韓國과 러시아간에 벌어진 교섭과정을 지켜보면서 한국정부의 무신경한 일처리에 착잡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한국정부로부터 31일 釜山港에 입항해달라는 통보를 러시아측이받은 것은 이달초.러시아측은 이날이 대한항공(KAL)007機 격추사건 10주년이 되는 날이라 이날 함대가 입항할 경우 한국민의 감정을 거스르지는 않겠는지를 우려해 입항날 짜를 다시 문의했다. 별 생각없이 입항일을 정했던 한국정부는 러시아측의 문의에 당황,외무.국방등 관련부처들이 긴급 협의를 갖고 입항일을내달 6일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새롭게 문제가 발생했다.통보가 너무 늦어져 러시아측은현재 방문중인 中國의 靑島港 출항일을 釜山港 입항일자인 31일에 맞춰 이미 조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내달 6일에 맞추려면 러시아함대가 며칠동안이나 公海상에서 표류라도 해 야할 판이 된것이다. 러시아측이 대안을 내놨다.
러시아 해군측이 입항일을 예정대로 31일로 하되 러시아함대가KAL機사건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유감을 표시하는 의미로 釜山에 입항할 때 함정에 조기를 게양하고 8백명의 선원이 모두 희생자를 위한 묵념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 이다.
날짜를 새롭게 바꾸기에도 너무 늦었고 그렇다고 KAL機 사건을 두고 러시아에 대해 찜찜한 감정을 풀지 않고 있는 국민들을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국정부가 러시아측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나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냉전종식과 함께 동북아시아에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상징하는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釜山입항 의미는 재삼 강조해도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중요한 행사를 치르면서 사전에 아무런 고려없이 행사일자를 정한 것은 쉽게 납득이 안된다.
사상 최초라는 사실에 너무 집착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정말 중요한 문제들을 제쳐놓았던 韓.蘇수교 교섭당시의 모습이 이번 해프닝 과정에서도 반복되고 있어 韓國외교가 보다 섬세해질 필요가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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