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셰익스피어의 걸작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2막2장에는 줄리엣이 로미오를 향해 이렇게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저의 원수는 오직 당신의 이름뿐이에요. 오,이름을 바꾸세요. 장미꽃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향기가 나잖아요. 로미오가 아니라도,그 이름을 버리더라도 천생 타고나신 고귀한 덕성은 변치않을 거예요.』
이름때문에 생긴 비극의 대표적인 예로 흔히 이 작품이 꼽힌다. 양가가 서로 원수처럼 지내 두사람의 결합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줄리엣이 로미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줄리엣의 절규처럼 사람의 이름이란 바꾸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별한 예외도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름을 갖게 되면 죽을때까지 그 이름과 함께 살아야 한다. 살아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도 이름은 그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를 증명해 준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인사유명 호사유피)는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말로 사람의 이름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일깨운다. 이 세상을 사는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악명을 떨치거나 오명을 남기기보다는 명예롭고 추앙받는 이름으로 남아야 한다는 교훈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값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듯 하다. 어떤 작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가리켜 「익명의 사회」라는 표현을 쓴 일도 있거니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감추려 하는 것은 눈앞의 이득만을 생각하고 그로인해 자신의 이미지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될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 탓이다.
최근의 금융실명제 파동도 여러가지 다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소홀하게 다루는 풍조가 한몫 거들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홍길동이니,이순신이니 하는 이름들이 은행계좌 등에 많이 올라 있다는 사실을 어쨌거나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가명의 사회,차명의 사회가 옳은 사회일 수 없음은 분명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