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한채 값이 「떡값」이라니…/정철근 사회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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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사정바람으로 한때 잘 나가던 고위공직자들이 뇌물수수 혐의로 줄줄이 법정에 서게 되면서 법정 주변에는 때아닌 「떡값논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들은 수백만원을 받았건,수억원을 받았건간에 한결같이 직무와는 무관하게 인사치레로 받은 「떡값」 명목의 돈이었다고 항변하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동화은행 비자금 조성사건과 관련,구속기소된 김종인의원(전 대통령경제수석)도 「떡값론」을 펼치는 이들중 하나였다.
김 의원은 22일 열린 자신의 첫 공판에서 『안영모행장으로부터 받은 돈은 안 행장을 연임시킨다든지,동화은행에 대한 특혜를 준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평소 두터운 친분에 따른 성의표시』라고 주장했다.
다만 김 의원은 『이용만 당시 재무장관이 안 행장 연임에 대한 의견을 물어와 개인적인 견해를 말한적은 있다』며 안 행장 연임에 대해 거론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시인했다.
그러나 대통령경제수석이라는 막강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시중은행장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재무장관에게 건네는 「한마디」가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쳤고 안 행장이 거액을 건넨 것이 개인적인 친분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 직위가 갖고 있는 「파워」 때문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 의원은 자신이 대쪽같은 청렴강직함으로 인해 사법부의 사표로 존경받고 있는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의 친손자라는 것을 의식하며 행동에 무척 신경써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인지 경제계에서는 비교적 깨끗한 공직자라는 평가를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비교적 「깨끗한 공직자」로 평가받아온 김 의원이 말하는 떡값 2억1천만원이라는 액수는 명절때 단순한 성의표시로 보기에는 너무나 큰 돈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떡값」은 실질적인 특혜에 대한 반대급부를 의미하는 뇌물과는 구별되어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요즘 문제가 되고있는 떡값은 말 그대로 순수한 의미의 떡값 수준을 뛰어넘어 이미 「집한채 값」 수준에 이르고 있는 현실이다.
「집한채 값」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떡값」이라고 우기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을 듣고 일반서민들이 느끼는 배신감이나 당혹감이 어느 정도일까를 한번쯤 먼저 헤아려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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