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사진(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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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때 외교관과 정치인을 지낸 한 인사를 모델로 한 한운사씨의 소설 『대야망』에는 주인공이 덕수궁의 여러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외국의 실력자들에게 뿌리고 다니며 자기집이라고 자랑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내집이 이 정도니 한국서의 내 위치를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도에서 였고,그같은 의도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언론계에서도 여러해전 어느 기자가 덕수궁 석조전앞에서 잠옷바람에 이 닦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해외출장중 이게 내집이라고 자랑하며 다녔다는 일화가 전한다.
자신의 입장을 과장하고 부풀려 상대방에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 한국인의 병폐 가운데 하나고,위의 사례들은 그 목적이야 어디 있었던지간에 그같은 과시욕이나 현시욕의 모델케이스에 속한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얼마전까지만 해도 외국여행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그 경험 자체가 크나 큰 자랑이었고,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외국에서 찍은 사진들이 곧잘 동원되었다. 여러나라의 명소들을 찾아다니며 그곳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이 해외여행 경험을 입증하는 「증명」사진이었다. 70년대 어느 유명한 사기꾼은 몽타주기법으로 세계의 명소를 배경으로 한 자신의 사진을 여러장 만들어 사기에 이용한 일도 있었다.
「증명」사진은 해외여행 경험을 입증하는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작년 3월 14대 총선때는 야당 후보들이 한결같이 야당지도자와 함께 찍은 사진을 선거운동에 이용했고,그것은 지역에 따라 승리의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몇장의 「증명」 사진들이 지도자와 가깝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 동원된 것이다.
자유롭게 외국을 드나들 수 있게된 지금도 한국사람들은 어느 나라 어느 곳에가거나 우선 사진부터 찍고 본다. 수십명이 떼지어 몰려다니며 사진찍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영락없이 한국인들이다.
「왜 한국사람들은 저렇게 사진찍기를 좋아하느냐」고 의아해하는 외국인들도 많다. 독일 베를린의 한 세미나에 참석한 해외연수팀 50여명이 또 사진찍기 소동을 벌여 망신을 당했단다. 부인이 길을 잃어 사진을 함께 찍지 못하게 되자 외국인이 보는 앞에서 뺨을 때리기도 했다니 추태도 이만저만한 추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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