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87년 「셀마」 태풍 때 인재 시비 곤욕-당시 부여 농개조 유병돈 조합장|"엄청난 재앙 덕분, 배수장 현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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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기상대도 몰랐던 폭우가 칠흑 같은 밤중에 물동이로 퍼붇듯 쏟아 내릴 줄 누군들 알았겠습니까. 태풍 셀마가 몰고 온 수해는 바로 참상 그것이었어요. 오후 10시부터 쏟아진 폭우가 시간이 갈수록 거세지는 것 같아 잠을 자다말고 뛰쳐나왔지만 저지대엔 물이 이미 허벅지까지 차 올랐어요.』
87년7월 태풍 셀마에 의해 엄청난 수해를 당한 뒤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는 언론의 표적이 되어 재해 주민들에게 두 차례나 멱살을 잡히고 전후 네 차례나 곤욕을 겪었던 당시 부여 농지 개량 조합장 유병돈씨 (53)는 너무나 억울해 지금까지 가슴앓이를 하고있다고 했다.
유씨는 수해 이후 복구 과정에서 두달 이상 밤잠을 설치는 등 전력을 다하고 인재보다 천재라는 사실이 서서히 밝혀지면서 89년 민선 조합장에 재선돼 지금까지 부여 농지 개량 조합장으로 일하고 있다.
『당시 부여와 서천 일대의 수해는 기상대 개설이래 최대의 호우라더군요. 하루 50mm만 쏟아져도 비상이 걸리는데 87년7월21∼22일 이틀간 6백5mm가 쏟아졌으니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지요.』
대한해협으로 우회하리라던 셀마가 내륙으로 들어서면서 전혀 예측 밖의 폭우를 퍼부었다. 22일 하룻동안 5백70mm 이상이 쏟아지면서 피해가 극심했던 임천 출장소는 오전 4시쯤 진입 도로조차 막혔고 방산 저수지를 비롯, 옥산지·복심지 등 곳곳에서 제방이 넘치고 주요 하천인 은산천 둑이 터져 내리고 있다는 보고가 줄을 이었다고 술회했다.
『특히 반산지는 제방길이만 9백m가 넘고 6백만t이상을 담는 저수지여서 가장 심각했습니다. 제방이 무너져 내린다면 순식간에 5천∼6천가구가 물바다가 될 위기였지요.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대원들과 함께 저수지에 달려가보니 둑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어요. 모두 주저하고 있어 저부터 먼저 뛰어들었죠. 제방에 비닐 피복을 입혀 간신히 위기를 넘겼습니다.』
물이 불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는 그는 당시 농지 개량 조합의 관리 소홀로 가동이 되지 않았다고 질타를 당했던 부여·홍산·임천·세도 등 4개 출장소 관할 8개 대형 양수기는 양호한 상태였다고 했다. 그러나 일시에 밀어닥친 홍수 때문에 보조양수기가 잠겨버려「가동이 불가능 했던건 2기뿐」이었다고 그는 이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50년대 제품인 구식 양수기는 보조 양수기로 대형 양수기를 일시 진공 상태로 만들어야 가동이 됩니다. 용수로에 부유 물질이 들어가도 지장을 받지요. 피치 못할 상황을 설명했지만 주민들은 막무가내였고 네차례나 몰려와 농성을 벌였어요. 당시엔 언론들까지 흥분해 주민들을 부추기는 바람에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었지요.』
멱살을 잡히는 등 곤욕을 치르고도 말을 못했던 그는 너무도 억울할 때엔 직원들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당시 부여 중학교에 수해 주민 격려차 찾아왔던 민정당 대표 노태우 전 대통령도 농민들에게 갇혀 3∼4시간 동안 곤욕을 치렀어요. 어렵게 주민들을 설득, 군수와 함께 두사람이 나서 공개 사과하는 선에서 위기를 넘겼지요. 항간에서는 제방을 일부러 터뜨렸다는 악소문이 도는 등 인심도 흉흉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이때 재해로 부여 지방 수해 대책은 배수장이 8개에서 19개로 늘어나는 등 시설 개수를 포함, 20∼30년은 족히 도약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부여·논산 지역이 금강수계 중 바닷물이 역류하는 지점인데다 대정댐 등 상류 지역의 방류 수량에 따라 수해에 가장 많이 노출돼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적어도 4대강 유역은 홍수 예보 체계가 자동 발동되고 농민들도 농지 주변의 물꼬를 트는 등 평소부터 수해 대책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재난을 예방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부여=배유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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