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안보리 이사국 "초읽기"|이장규<뉴욕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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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일본이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려는 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유엔헌장에 명기되어 있는「적국조항」, 다시 말해 2차 대전을 일으킨 나라들에 대해 제한을 가하도록 되어 있는 것부터 없애자는 노력을 수년 전부터 꾸준히 해 왔었다. 족쇄나 다름없는 적국조항부터 떨어내고 나서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입을 추진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들어서는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최종 목표에 도전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일본이 이 문제를 유엔에서 공식거론한 일은 아직 없으나 일본 특유의「분위기 조성」에는 상당한 선행 투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유엔 외교 가에 알려져 있다. 논리적으로는 일본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에 반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유엔 주변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한일관계의 연장선에서 유엔에서의 일본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열강들 사이에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일본이 안보리상임이사국에 들어가는 것은 지극치 순리적인 것이다』
냉전체제의 종식 등 세상이 엄청나게 달라졌을 뿐 아니라 유엔에 대한 일본의 재정적인 기여도가 미국 다음인 상황에서 돈만 내고 권리행사를 못하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유엔 예산의 25%를 미국이 부담하고 있는데 이어 일본이 12·45%로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과 함께 안보리 상임이사국에서 빠진 독일의 부담비율 역시 8·93%로 영국(5%) 프랑스(6%)보다 높다. 돈 문제나 특정국의 이해를 따지지 않더라도 일반론적인 유엔 개편 론 또한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지난해 47차 총회에서 인도등 비동맹국들이 중심이 되어 안보리개편에 대한 총회의 결의를 통과시킨 것이 바로 그런 예다. 이 결의에 따라 회원국들은 금년 6월말까지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에게 개편 안을 제출하도록 되어 있고 사무총장은 금년의 화차 총회에 보고하게 된다 현재까지 30개 안팎의 회원국들로부터 개편 안이 접수됐는데 공통된 사항은「현재 5개국인 안보리 상임이사국 숫자를 더 늘려야 한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의 운영이 늘 그래 왔듯이「끗발」있는 몇 나라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엇갈리느냐가 중요한 변수다. 마치 주주총회에서 주주의 머릿수보다 대주주 몇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과 흡사하다.
현재로서는 대주주 국가들의 생각이 각기 다르다. 미국이 유엔의 개편 문제에 가장 적극적이다 . 매들 린 올브라이트 유엔 대표부 미국대사는 지난 8일 뉴욕에서 열린 외교정책협의회에 참석,『유엔안보리는 새로운 현실과 책임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일본과 독일이 상임이사국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국이 유엔의 개편작업에 앞장서는 가장 구체적인 이유는 유엔체제를 유지해 나가는 부담을 현실화시켜 나눠지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엔의 상당한 비용을 일본이나 독일의 막강한 경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는 것은 불가피 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일본으로서는 독일의 상임이사국 문제와 동일 티킷으로 돼 있다는 점이 오히려 걸림돌이다. 독일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강력치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상임이사국에 들어갈 경우 영국이나 프랑스의 기득권이 유엔 무대에서 그만큼 약해질 뿐 아니라 이들의 독일에 대한 감정적인 앙금 또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독일의 경제적인 영향력을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본의 경제력이 세계를 휘어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막바지에 와 있는 EC통합 작업만 해도 독일의 협력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든 안보리가 상임이사국 숫자를 더 늘린다는 것을 전제로 개편작업이 계속 추진될 경우 일본과 독일의 포함 문제는 시간문제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엔 주변에선 지배적이다.
근본적인 아이러니는 전쟁을 일으켰던 나라들이 패전의 수렁에서 벗어나 지금은 어떤 승전국들보다도 잘살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제사회에서「적국」으로 규정됐던 이들이 이제는 현실적인 힘을 바탕으로 유엔의 안방차지를 목전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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