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일깨우는 동화세계 빔 벤더스 감독『베를린 천사의 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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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78년 영화『미국인 친구』의 국제적인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독일의 청년 영화작가 빔벤더스는 청운의 꿈을 안고 할리우드로 떠난다. 오랫동안 자신을 매혹시켰던 미국 영화의중심지에서 그는 존경해마지않던 니컬러스 레이 같은 왕년의 대가들에 견줄만한 영화를 만들려는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신예 제작자로 부상하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초청으로 영화『해미트』의 제작에 착수한 그는 그러나 오래지않아 말로만 듣던 할리우드의「게임의 규칙」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그가 촬영한 부분을 본 제작자는 이래선 도저히 흥행이 안된다며 재 촬영을 지시했고 그가 이에 불복하자 다른 사람에게 감독을 맡기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할리우드에서「작가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그는 비싼 수험료를 지불하고 확인하게된 것이다.
벤더스가 오랫동안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독일로 돌아와87년에 만든『베를린 천사의 시』는 그가 자신은 어떻게 해도 유럽인, 구체적으론 독일인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영화다. 20세기 독일사의부침을 한 몸으로 겪어낸 도시베를린에서 그는 자신의 오랜 방황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발견한다. 영광과 오욕으로 얼룩진 이 분단된 도시에서 그는 자신이 피하고자 했던 독일의 부끄러운 현대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각성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랑의 가능성이다. 항상 사랑에 대해 주저해하던 벤더스 영화의 주인공은 드디어 이 영화에서 사랑의 가능성에 본격적으로 몸을 던진다. 베를린 상공을 배회하던 천사 다미엘은 고독한 서커스단곡예사 마리온의 은밀한 독백을 들으면서 인간의 사랑에 대해 눈뜨게 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이 영화가 벤더스의 전체작품에 대한 계보학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영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골치 아픈 예술영화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는 편안한 마음을 가진 누구에게나 접근이 허용된 개방된 공간이다. 이 세계는「왜 나는 너가 아닐까, 그리고 왜 나는 거기가 아니고 여기에 있어야할까」하는 어린이의 의문에서 사물을 보는, 지극히 동화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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