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인 현정화, "인간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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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예테보리 대회 여자단식우승으로 탁구사상 유례없는 세계선수권대회 4대타이틀(여자단· 복식·혼복·단체전)을 한차례씩 섭렵한 「피노키오」 현정화(24·한국화장품)가 이제 가야할 곳은 과연 어디인가.
녹색테이블을 떠나 여인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엄연한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승부의 세계에 더 머무를 것인지. 역대 탁구선수 중 가장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라는 현도 이 문제에 관해선 얼른 대답을 못하고 있다.
정말 최선을 다했고 욕심을 내기도 했던 지난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기대에 부응치 못하고 동메달 2개에 그쳤을 때 쏟아진 주위의 실망감은 현의 마음과 몸 모두를 극도로 지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92시즌 마지막대회인 종합선수권대회에서 고교생 유지혜(부산선화여상)에게조차 패했을 땐 이름표와도 같이 언제나 가슴 한가운데 붙어있던 태극마크마저 아물거렸다.
그러나 패한 모습으로 등을 보인 채 쓸쓸히 무대를 내려가는 것은 오똑한 콧날만큼이나 자존심 강한 현에게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치욕.
고사리 같은 손이 라켓을 꼭 쥐어주며 『꼭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열심히 해다오.』부산 계성여중 2년 때인 83년 돌아가신 탁구국가대표 상비군출신 아버지 현진호씨(당시 48세)의 유언이 따로 필요 없었다.
지난해 말부터 재발한 고질적인 허리부상과 느닷없이 들이닥친 위장병으로 평소 53㎏의 체중(신장 1백66㎝)이 48㎏으로 줄고 장기인 송곳스매싱이 기어가는 듯 힘없다는 질책을 받았지만 현은 오기로 버텨냈다.
선발전 없이 다시 한번 조국을 위해 뛸 기회를 준 대한탁구협회의 배려와 이유성 감독의 치열한 승부욕, 볼 박스를 몇 개나 비울 정도로 혹독한 스파르타식훈련의 김기택 코치 등 코칭스태프의 정열은 현에게 새로운 도전의욕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탁구인 누구도 예측 못한 꿈같은 단식 세계챔피언의 타이틀을 따내 한을 풀었지만 눈물은 결코 보이지 않았다. 경기란 언제나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한낱 일상사임을 현은 깨달은 것이다.
은퇴도 때가되면 자연스레 이뤄지는 것일 뿐. 현은 단식 우승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은퇴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체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취를 분명히 밝혔다. 한국탁구로선 현의 체력이 소진되기 전 현을 능가할 샛별이 탄생해줘야 앞날이 밝은 것이다. 【예테보리=유상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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