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으로 자위하는 일본인/이석구 동경특파원(특파원 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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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본에 와본 한국사람들은 그 살인적 물가고에 혀를 내두른다. 숙박비나 물건값을 한국돈으로 환산해보고 나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더구나 최근 엔고가 급격히 진행됨으로써 일본을 찾는 사람들은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다는 느낌마저 갖는다. 지난 2월 달러당 1백25엔일때 일본을 찾았던 사람들은 1백10엔대인 지금 3개월만에 물가가 10%이상 오른 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니혼게이자이(일본경제)신문에 따르면 7일 현재 동경의 물가가 워싱턴보다 쌀(10㎏ 5천9백60엔)은 3배,우유(1ℓ 1백88엔)와 이발료(3천8백엔)는 2배,휘발유(1ℓ 1백23엔)는 4배,그리고 와이셔츠 세탁료(2백30엔)는 0.5배정도 높다. 이는 달러당 1백10엔을 기준으로 환산한 결과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물가고를 그다지 실감하지 않고있다. 물가가 매년 올라 이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라 85년부터 시작된 엔고탓이기 때문이다. 85년도 이후 일본의 연평균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2∼3%수준으로 별로 오르지 않았으나 엔은 달러당 2백40엔수준에서 1백10엔대로 올랐다.
엔고는 일본의 국민총생산(GNP)을 끌어올리는데도 한몫 단단히 했다. 일본은 지금 1인당 GNP가 2만5천달러를 넘어 미국을 훨씬 능가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허수일뿐 실제 국민생활의 질이 향상된 것은 아니다. 일본인들이 실제 살고 있는 삶의 질을 따진다면 일본은 아직 멀었다. 우리와는 비교가 안되지만 도로·항만·통신등 사회간접자본이 미국이나 유럽의 그것과 비교하면 아직 멀었다. 주택은 더욱 비교가 안된다. 일본의 주택보급률이 1백%를 넘고 1인당 평균 주거면적은 한국보다 넓지만 중산층 이상의 주거면적은 우리보다도 못하다.
한편 일본의 생산성이 높다고 하지만 실제 생산성을 따져 보면 미국에 뒤진다는 통계가 있다. 일본의 높은 생산성은 노동시간이 많은데서 기인할 뿐 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근로자 1인당 연평균 노동시간은 2천시간을 넘는다. 일본은 이를 1천8백시간으로 단축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쉽게 실현될 것 같지 않다. 노동시간을 줄이려면 잔업을 없애야 한다. 업계는 잔업을 줄일 경우 생산성이 저하되고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반발하고,근로자는 잔업수당이 깎여 생계에 지장을 받는다고 반대하고 있다.
사회보장시스팀도 서구에 비해 훨씬 뒤진다. 노후가 서구처럼 보장돼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이 열심히 일만 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디를 가나 공평한 급여수준과 대우등 이른바 「사회적 평등」이 실현됐다는 점일 것이다. 일본은 최고경영자와 근로자의 평균임금 격차가 4.2대 1이다. 반면 한국은 12대 1,미국은 9대 1이다. 일본은 연령급으로 나이에 만엔을 붙이면 대개 급여수준이 된다.
살인적 물가라고는 하지만 이는 달러표시 물가일뿐이고 일본내 소비자물가는 안정돼 있으니 참을만하다. 또 주택보급률도 1백%가 넘어 주거 불안이 없다. 집없는 사원들은 회사에서 사택을 마련해주고 집세가 싼 공영주택이 곳곳에 있어 집없는 서민들에게 집을 제공해주고 있다.
출퇴근 교통비는 회사가 전액 부담한다. 집은 좁지만 가까이에 넓은 공원이 있어 즐길 수가 있다. 개인이 소유하는 것은 작지만 공공소유는 우리보다 훨씬 크다. 개인보다 공공을 우선하는 사회구조가 오늘날 일본번영을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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