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와인의 匠人’ 루게 <下>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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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29면

임마누엘 루게가 시음용으로 내준 2005년산 와인들은 한결같이 높은 완성도를 뽐냈기 때문에 마을 단위급 와인인 ‘본 로마네’를 마셨을 때부터 우리는 와인을 냉정하게 뱉어낼 수가 없었다. 루게에게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삼키게 됩니다”라고 말하자 루게가 한바탕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기쁨이 묻어나는, 어린아이처럼 맑고 꾸밈없는 웃음. 그 얼굴을 보자 우리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와인 시음기-‘앙리 자이에 에세조 1999’

‘본 로마네’ 다음으로 시음한 것은 1급 와인인 ‘레 보몽’. 마을 단위급 와인과 달리 윤곽이 분명하고 힘차다. 하지만 이 와인 또한 우아하고 섬세한 매력을 풍기기는 마찬가지다. 루게의 와인은 아무리 강인한 밭에서 나는 포도로 만들었어도 우아함과 세련된 고상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루게의 숙부이자 스승이기도 한 고(故) 앙리 자이에의 개성이기도 하다.

‘보몽’에 이어 루게의 대표적인 와인 중 하나인 특급 ‘에세조’가 나왔다. 이것은 정말 대단했다. ‘에세조’를 입 안에 머금은 순간 너무나 큰 충격에 이제까지 시음한 모든 와인의 인상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비강을 간질이는 달콤한 꽃 같은 아로마, 가녀린 소녀의 긴 머리카락 같은 우아함, 부드러움. 이처럼 완벽한 부르고뉴 와인을 내 평생 몇 번이나 마셔볼 수 있을까. ‘부르고뉴의 신’으로 추앙받은 앙리 자이에가 지향했던 ‘지금 마셔도 맛있고, 오래도록 숙성시켜도 맛있는’ 와인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에세조’ 다음으로 자이에한테서 물려받은 1급 밭의 와인 ‘크로 파랑투’도 시음했다. 동행한 나카타는 “나도 이 와인을 시음하는 건 처음”이라며 감격했다. ‘크로 파랑투’는 우아하긴 하지만 ‘에세조’에 비하면 장기 숙성형 와인답게 근육질이라 본연의 매력을 발휘하기까지 10년 이상 걸릴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환상의 와인’이라고도 하고, 루게의 와인 중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유통되는 ‘크로 파랑투’지만, 나는 그 전에 마신 ‘에세조’의 맛이 더 감동적이었다.
루게는 2000년께 건강을 해쳐 자이에가 그를 대신해 와인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부르고뉴에 사는 나카타도 그런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이 말에 루게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재미있군요. 사실 그 무렵에는 고령이신 숙부가 몸이 좋지 않아 내가 그의 와인 작업을 거들었어요.”

세상 사람들은 루게가 한때 자이에의 후계자라는 중압감에 눌린 나머지 건강이 상했다고 소곤거렸다. 하지만 오랜 농사일로 흙과 포도즙이 배어 들어 변색되고, 살갗이 딱딱해진 그의 큰 손과 악수했을 때 그 소문은 터무니없는 억측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신(神)이 아닌, 대지와 포도와 마주하며 묵묵히 와인을 만들어온 남자의 손. 평생을 농부로 살아온 것에 자부심을 느껴온 자이에도 분명 이렇게 검고 딱딱한 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번역 설은미 

<와인 시음기-‘앙리 자이에 에세조 1999’>
강골 뼈도 녹여버리는 환상의 와인

앙리 자이에가 와인 메이커 중에서도 ‘부르고뉴 지역의 신’으로까지 추앙받은 첫째 이유는 물론 와인을 잘 만들어서다. 그것뿐이라면 좀 아쉽다. 그가 놀라운 것은 100% 뉴 오크 (New Oak)를 사용하면서도 부르고뉴 와인의 특징인 섬세함을 잃지 않으며 매우 미묘한 와인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자이에가 자랑하는 와인 만들기 노하우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는 항상 포도를 잘 관찰하는 것이다. 포도 줄기를 끝까지 쳐낸 뒤 포도 줄기를 씹어보고 줄기가 아직 익지 않고 신맛이 나는지 판별한 뒤 포도 알이 열렸을 때 햇볕이 포도송이에 속속들이 잘 배어들 수 있도록 해준다. 그만큼 포도송이를 잘 익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둘째는 엄격한 포도 질 관리. 보통 와인 메이커들은 40hL(헥토리터)/㏊ 정도로 와인을 생산하지만 앙리 자이에는 20hL/㏊로 와인을 만들어낸다. 단위 면적당 매우 적은 수확량을 보이는 것이다. 셋째는 늦게 수확한 포도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늦게 거둬들인 포도는 적기에 수확한 포도보다 향이 진하고 발효도 훨씬 늦어지는 편이다. 앙리 자이에의 소원 중 하나는 바로 부르고뉴 최고의 밭인 ‘로마네 콩티’를 양조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았으며 실제로 필자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번 주에 소개할 ‘에세조 1999’는 자이에의 실력을 엿볼 수 있는 대표작이다. 테이스팅 후 ‘앙리 자이에가 그냥 앙리 자이에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루비색이 참 곱게 느껴진다. 꽃 향기부터 체리향에 인삼과 스파이시한 향까지 피어오르는데 단 하나의 튀는 느낌도 없다. 제법 무게감이 느껴지는 쌉쌀함과 적절히 입 안을 정리해 주며 긴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 맛까지. 입 안에 감기는 팔래트가 예술이다.

단단한 뼈대는 물론이고 긴 피니시가 매우 인상적이다. 부드럽고 은은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파워는 놀라울 정도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향기가 코를 마비시키고 강골의 뼈도 녹여버릴 정도의 팔래트는 환상적이다. 오크 100%지만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은은하고 수려한 캐릭터를 지녔다. 참 예쁘게 만들어진 와인이다.
이준혁(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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