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4부] 겨울 (10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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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선생님 우리 둥빈이 어릴 때부터 착하고 어진 아이였어요. 만일 그 애가 누구를 때리거나 잘못한다면 그건 제가 그 애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어서 그 애가 잘못 자랐기 때문이에요. 아이들 일에 대해서라면 하나도 바쁘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 둥빈이가 잘못하면 저를 불러주세요. 언제든 제가 와서 벌을 서겠어요. 하지만 우리 둥빈이에게 억지로 공부를 잘해야 한다거나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머리가 나쁜 아이는 아니니까, 언젠가 제 결심이 서는 날, 시작해도 늦지 않겠지요. 다만, 규칙을 위반하거나, 단체 행동에 방해가 될 때에는 선생님께서 그 아이를 나무라주세요. 하지만 다른 일로는 그 애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말아주세요.”

 엄마의 말은 낮았지만 침착했다. 담임이 놀란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랬다. 엄마는 어쨌든 시험을 앞두고 있으면 문제지를 앞에 놓고 동생들을 야단쳐가며 가르치곤 했었다. 공부를 왜 잘해야 하는지 일장 연설도 했다. 그런데 엄마의 말은 뜻밖이었고, 또 거기에 진심이 깃들어 있었기에 나는 공연히 엄마에게 미안해졌다. 방금 우리 담임선생님에게까지 싫은 소리를 듣고 온 엄마가 아닌가 말이다. 엄마가 어깨를 옹송거리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자 나는 처음으로 내가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 밉고 싫고 미안했다.

 둥빈은 차 뒷자리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엄마는 아무 말도 없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집으로 가는 가까운 길이 멀게 느껴졌다. 한참 후 엄마가 입을 열었다.

 “그 애가 어떻게 널 모욕했는지…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둥빈아, 때리는 게 나쁜 거라는 것은 너도 알고 있으니 긴 말은 하지 않겠다. 너도 그럴 만하니 그랬겠지.”
 옆자리에 앉은 둥빈의 어깨가 굳어지고 있었다.

 “선생님께 말씀드렸어. 다만, 앞으로 엄마가 벌을 받겠다고. 괜찮아. 앞으로 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벌은 엄마가 받을게.”
 둥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둥빈이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싶자 나도 공연히 눈물이 고였다.

 “공부? 네가 하는 거야. 네 인생? 네가 사는 거야. 엄마는 어차피 너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날 거야. 함께 있을 때까지는 엄마가 도와주지만 그 다음엔 너희의 몫이야. 더 길게는 잔소리하지 않겠다. 그리고 어쨌든 둥빈, 엄마가 온다고 힘든 반성문 써준 거 고마워. 내친김에 한 마디만 더 하면 인마, 반성은 조건 없이 하는 거야. 네가 이러면, 네가 저러면 이런 거 없어.”

 집에 들어가자 둥빈은 가방을 팽개치고 방에 틀어박혔다. 엄마는 엄마대로 서재의 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막내 제제만 태권도복을 입고 철봉인지 곤봉인지를 연습한다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서재로 들어갔다. 엄마는 책상에 앉은 채로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엄마의 책상 앞에 앉았다. 내가 들어오는 기척을 듣고도 엄마는 고개를 들지 않았는데 눈가로 눈물을 닦는 것이 보였다.

 “엄마 나… 시간 얼마 안 남았지만 공부 열심히 할게.”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맨손으로 눈물을 닦다 말고 엄마가 잠깐 웃었다.

 “…그래 고마워.”
 
“엄마 너무 속상해하지 마. 6학년 때 조금 공부 못해도 나중에 공부 잘하는 애들 많아. 6학년 때 내 짝인 남자애도 그땐 나보다도 공부 못했는데 지금 전교에서….”

 “위녕, 엄마가 둥빈 담임선생에게 했던 말, 진심이야.”

 엄마는 내 말을 막으며 입을 열었다.

 “공부? 그거 재능이야. 엄마… 공부 잘했는데… 그거 내가 피눈물나게 노력해서 그렇게 된 거 아니야. 그냥 처음부터 그랬어. 축구공을 보자마자 볼을 찼다는 선수처럼, 피아노를 보자마자 동요를 연주했던 피아니스트처럼 그건 그냥… 재능인 거야. 모두가 다 같이 공부를 잘할 수는 없어. 그 재능을 가진 게 꼭 내 아이들이어야 한다는 헛된 희망도 버렸어. 왜냐면 왜 너희가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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