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4부] 겨울 (10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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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그렇게 일 년이 지나가고 다시 가을이 되었다. 나는 드디어 고3이 되었다. 아침 6시 반에 집을 나서서 밤 11시까지 학교에 있는 일은 이제 별로 낯선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여전히 바빴고, 여전히 어린아이 같을 때가 많았다. 동생들은 여전히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보고 싶었다. 학교 친구들은 점심만 먹으면 태풍이 지나간 들판의 벼들처럼 일제히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고, 라떼와 밀키는 어른 고양이가 되었다. 대학 입시는 내가 가야 하는 길 저쪽에서 불도저처럼 나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내 성적은 더 떨어졌다. 그리고 엄마는 학교에 불려와 내 성적으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은커녕 지방의 4년제 대학도 가기 어렵다는 충고를 담임선생으로부터 들었다. 엄마는 담임선생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부를 못한다고 나를 야단치지도 않았다. 엄마를 따라 학교 앞으로 걸어오는데 엄마가 차에 타면서 뜻밖에도 둘째 둥빈이네 학교로 가야 한다는 말을 힘없이 꺼냈다.

 “오늘 모처럼 집에서 쉬면서 남들이 그렇게 하라고 하는 운동이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무슨 일인지 둥빈 담임선생님도 엄마를 호출했어. 집에 먼저 가 있을래?”
 나는 하지만 엄마를 따라 그냥 둥빈의 학교로 갔다. 엄마는 막지 않았다. 오랜만에 오는 초등학교 교실들엔 언제나처럼 알록달록한 색종이들이 붙어 있었다. 엄마의 어두운 얼굴과는 달리, 나는 한때였으나 내 초등학교 친구들과 저런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일을 생각했다.

 둥빈의 6학년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둥빈 혼자 남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둥빈의 담임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임선생은 둥빈을 불러 쓰고 있던 것을 가져오게 한 다음, 둥빈에게 잠시 내려가 있으라고 말했다. 둥빈은 나까지 학교에 따라온 것을 보자 약간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엄마가 둥빈에게 차 열쇠를 주면서 먼저 타 있으라고 하자, 둥빈은 엄마를 향해 무슨 말인가 할 듯하더니, 안경을 올리고는 그대로 교실을 나가버렸다. 둥빈이 내민 종이에는 언뜻 반성문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둥빈의 담인선생은 나를 힐끗 보더니 말을 시작했다.

 “둥빈이가… 어제 친구와 크게 싸웠어요.”
 담임선생이 말을 시작하자 엄마는 각오하고 있다는 듯이 입술을 물었다.

 “두 녀석 다 반성문을 써오라고 했는데, 상대 녀석은 써왔는데 둥빈은 쓰지 않았어요. 왜 싸웠는지 둘 다 말을 안 하고….”
 “선생님 우리 둥빈이는 다른 아이를 이유 없이 때리는 아이는 아니에요.”
 엄마가 앙다문 입술을 떼고 천천히 말했다. 엄마 또래인 담임선생님의 얼굴로 조소의 빛이 언뜻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거야 모든 어머니들이 하시는 말씀이구요.”
 그러고 나서 담임선생은 잠깐 웃었다. 엄마 역시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으리라.
 “둥빈이도 물론 그러지 않는 아이겠지만, 맞은 아이는 반장에다가 모범생이에요. 어머니도 몇 년 동안 학교의 학부모 회장직을 맡을 만큼 열성적인 분이시구요. 그 아이는 그냥 남하고 싸우는 그런 아이는 아니거든요.”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제가 둥빈을 혼내면서 반성문을 쓰라고 해도 쓰지 않기에 아까 전화를 드린 거예요. 그랬는데 둥빈이가, 그러면 어머니가 오시기로 했다고 하니까 겨우 반성문을 쓰더군요.”
 담임선생은 둥빈이 방금 쓰고 나간 반성문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성의 없이 갈겨쓴 몇 줄이 보였다.

 -그 아이가 저를 모욕하지 않는 한, 때리지 않겠습니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아 나는 얼른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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