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수는 개혁,짓는 개혁(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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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개혁의 회오리가 드세지면서 사정한파의 경제적 충격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사회 구석구석의 썩은 부분들을 도려내는 청정작업을 벌이다보면 얼마간의 진통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한 경제적 파장을 미리 예상하고 경제위축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노력은 그것대로 필요한 것이다.
개혁의 주체와 사정당국은 개혁작업의 경제적 파장이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특성을 지닌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컨대 정계의 개혁에 있어서는 비리의 장본인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새사람을 앉히면 조직의 정상적 기능을 금방 회복할 수 있지만 경제쪽은 사정이 다르다.
제일은행 행장의 정실대출혐의에 대한 조사의 파문은 개혁과 사정이 초래하는 경제적 충격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제일은행장에 대한 조사사실이 알려지자마자 행장의 동생이 경영하는 학산산업개발에 어음이 몰려 끝내 부도가 나고 말았다. 사정에 대한 경제쪽의 반응은 그만큼 예민하고 또한 충격도 즉각적인 것이다.
경제적 후유증은 일단 발생한 연후에는 수습하기도 어렵다. 가령 아들의 부정입학문제로 말썽이 된 개혁주도인물을 전격적으로 교체하는 식의 뒷수습은 경제쪽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런 후유증을 우려하여 정실대출 등의 불법을 눈감아주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당치도 않은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최대한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정충격의 한계가 대충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고 충격후유증의 뒤처리까지를 미리 헤아리는 안목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국민들이 정부의 성숙된 국가경영역량을 믿고 불필요한 불안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업계는 정계·관계·금융가에 난무하는 사정의 불똥이 언제 날아들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빠져들고 있다. 물론 이런 분위기가 이제 막 소생의 기미를 조금씩 나타내는 실물경제에 큰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정부가 개혁범위·강도·속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는 경제활동의 위축현상이 확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개혁당국은 일정한 개혁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과 수단의 선택에 있어서 비용과 성과의 상대적 크기를 보다 면밀히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경제분야의 개혁에서는 이 기준이 한층 중시돼야 한다.
한가지 방법은 악을 응징하는데 치중해온 지금까지의 개혁수단에 병행해서 선을 조장하는 시책들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전략의 확충을 통해,썩은 곳을 헐어낸 다음 그 자리에 짓고자 하는 실체가 무엇인가를 가시화함으로써 우리는 부수는 개혁에서 새로 짓는 개혁으로 한단계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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