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명예회복 반대한 옐친/김석환 모스크바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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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요즘 러시아 정치상황의 전개과정을 보면서 한국의 독자들은 아마도 보수파는 구공산주의 세력의 잔당으로 대부분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며,개혁파는 서구 민주주의의 기본원칙과 인권 존중 등 자유 평등 이념에 충실한 사람들이라는 단순화된 생각을 갖기가 쉽다.
그러나 모스크바 현지에서 취재하다보면 이러한 단순 도식화가 적용되기 어려운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지난 9일 정식으로 발효된 「재러시아 한인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안」의 통과 과정에서 보여준 개혁파와 보수파의 태도는 우리의 잘못된 통념을 뒤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이 법안의 골자는 지난 1937년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시베리아 원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의 명예회복과 그에 대한 피해보상이다.
이 법안 제정 과정에서 혼신의 힘을 쏟은 재러시아 고려인연합회,이를 측면 지원한 한국정부는 러시아정부의 협력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와 민주를 외치던 민주러시아나 보리스 옐친대통령은 이번 한인명예회복법안에 대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피력,우리를 실망시켰다.
반면 같은 소수민족인 추코트인 등 다른 소수민족 출신대의원들이 한인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했고,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의장도 지극히 우호적이었다는게 고려인연합회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옐친대통령은 러시아 최고회의에 보낸 서한을 통해 『고려인은 강제이주된 민족이긴 하지만 정치적 탄압을 받은 민족은 아니다』며 이 법안 제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했다.
또 피해보상에 대해서도 한인들은 이미 보상받았기 때문에 필요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옐친대통령의 이같은 서한이 러시아 최고회의내 민주러시아계 대의원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서방사회에 러시아 자유민주주의 최후 보루인양 비치는 옐친대통령과 민주러시아의 이같은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며,논리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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