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간장 녹이는 미인 같은 와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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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29면

부르고뉴의 와인 중에서 ‘크로 파랑투’는 빈티지에 상관없이 정말 구하기 힘든 절품이다. 1등급 와인 중에서도 이보다 더 구하기 어려운 와인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 가격 또한 만만치 않으니 일반인이 접하기에 그리 쉬운 와인은 아니다.

와인 시음기-‘크로 파랑투 1999’

지난해에 타계한 ‘부르고뉴의 신’으로 불린 앙리 자이에의 진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명주다. 그만큼 맛과 향이 뛰어나다. 앙리 자이에가 작고한 뒤 희소성의 가치까지 더해져 빈티지에 관계없이 부르고뉴 와인의 최고봉이라 할 ‘로마네 콩티’의 명성에 거의 근접해 있다. 이 정도가 되면 와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당연히 동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운이 좋았는지 올해 그의 조카인 임마누엘 루게가 생산한 ‘크로 파랑투’를 시음해 보았다. 오늘은 그중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1999 빈티지’를 소개해 볼까 한다. 올해 마신 와인 중에서도 가장 맛있게 마신 와인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좋았던 기억의 와인이다.

매우 투명하고 맑은 루비 빛깔이 꼭 소녀의 입술 색깔을 떠오르게 한다. 차분히 하늘하늘한 꽃 캐릭터로 시작한 향기는 체리·스트로베리·플럼 등의 붉은색 과일 캐릭터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가벼운 오크 터치와 동물적인 가죽 냄새까지 표현해 내며 은은하게 느껴지는 스파이시한 향기가 코를 아리게 만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유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느낌까지 뽑아낸다.

와인 중에서 이렇게 은은하면서도 화려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향기가 또 있을까. 살며시 입술을 적시자 부드럽게 치아를 휘감고 돌아나가는 비단 같은 떫은맛이 와 닿는다. 뒤를 받쳐주는 깔끔한 애시디티가 좋은 조화를 이루어낸다. 부드럽지만 입 안 가득 퍼져 나가는 피니시는 제법 오래 지속된다.

처음에는 은은하고 감미로운 향기로 서서히 피어오르다 사람 애간장을 녹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화려하게 변해가는 그 맛. 사람의 넋을 빼놓는 미인 같다. 입 안에 살며시 다가오는 은은하고 농염한 팔래트는 마시는 이를 무릉도원으로 안내한다.
노즈 부분에 있어서 이렇게 엘레강스한 느낌의 와인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정도로 매우 섬세하며 아름답다. 품종은 다르지만 ‘샤토 마고’와 엘레강스한 면에서는 자웅을 겨룰 만한 와인이다.

추천 빈티지는 1989·90·93·96·99·2002·2005. 음식을 곁들이기보다는 와인 자체만을 즐기시는 편이 좋을 듯하다. 현재 국내에는 재고가 없으며 11월께 2005 빈티지가 출시될 예정이다.

이준혁(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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