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준비 단단히 하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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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융실명제 실시여부를 둘러싸고 우리는 또 한번 혼선을 겪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같은 문제를 놓고 이처럼 계속 국력을 소모해야 하는지 알수 없다. 우리는 이미 두차례에 걸쳐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실명제를 도입하되 경제·사회적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단계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국민들의 일상생활이 거기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실명제를 실시하면 경제가 결딴나 더이상 감내하기 어렵기 때문에 유보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다른 한편에서는 새 정부가 출범한 지금 이 제도의 도입을 밀어붙이지 않으면 아예 물건너가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강하게 일고 있다.
이같은 불필요한 논란은 왜 계속 일어나는가. 정부수립자들이 실명제의 본질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이 제도의 도입 정착을 위한 정책선택에서 확고한 신념을 내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명제는 의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경제 및 사회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예측한 후에 가능하다. 민자당정부는 선거공약에서 실명제의 조기실시를 약속한 이상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을 밝히는 것이 옳다. 성장이 더디고 증시침체가 가속화 된다고 해서 이를 실명제 실시 유보의 이유로 내세우면 구태의연한 대응이란 비판을 받기 십상이다.
정부가 우선 해야할 일은 실명제가 어떤 제도인가에 대해 관계당국자와 김영삼대통령이하 정책수립자들이 동일한 인식을 갖는 일이다. 실명제는 금융 및 자본거래 등에서 모두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제도다. 또 제 이름을 밝힌 자산에 대해 종합과세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도 따라야 한다. 이 대책들은 과거 두차례의 값비싼 학습을 통해 배운 바와 같이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단계적인 절차나 준비가 필요하다.
1,2금융권과 증시에서의 실명제 도입 및 신협 등 소형 금융기관에 이르기까지의 전산망 확충,실명전환 유예기간의 설치,자기앞수표의 사용 및 무기명금융상품의 규제와 대체수단 개발,종합과세 시기의 결정,그리고 이 제도의 정착을 위한 정부 관계기관의 협조와 국민의식의 계도 등 산적한 과제들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그 일정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정부가 실명제의 도입을 위한 준비일정 제시조차 못한채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게 되면 오히려 혼선만 더욱 크게 할 위험이 있다. 실명제가 개혁을 위한 개혁이 아닌 이상 정부가 어떤 단계를 거쳐 도입해 가겠다는 확고한 모습을 보여야 경기활성화에 부정적일 수 있는 요인도 최소화할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가급적 빨리 입장을 정리해 이 제도 실시에 대한 일정을 언제쯤 마련할 수 있을 것인지를 우선 하는게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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