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의 훼손(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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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나라가 인류문화 발달사에 기여한 것을 꼽으라면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쇄문화일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1234년 『고금상정예문』이란 책을 찍어 낸 금속활자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보다 2백16년을 앞서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책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1972년 파리 국립도서관 서고에서 발견된 『직지심경요절』이란 책은 놀랍게도 1377년에 간행된 금속활자본이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인 『42행성서』(1452∼56)보다 약 80년 앞서 있는 것으로 확인됐지만 서양사람들은 여전히 구텐베르크를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가로 꼽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이같은 인쇄문화의 선진국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자랑스런 자료가 있다. 바로 팔만대장경이다.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관중인 팔만대장경은 모두 백화나무로 되어있다. 이 나무들은 거제도를 비롯,제주도·완도 등에서 벌채해 3년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가로 67㎝,세로 23㎝의 직사각형으로 잘랐다. 이것을 다시 소금물에 잘 삶은 다음 그늘에서 말려 표면을 매끄럽게 대패질 하고 그 위에 경문을 붓으로 썼다. 그 먹글자를 판각공들은 목욕재계하고 한자 한자 새겨 나갔다. 무려 5천2백71만9천여자. 그렇게 글자를 새긴 판각들은 다시 두끝에 각목을 마구리에 붙여 뒤틀리지 않게 하고 그 표면에 옻칠을 했다.
이렇게 정성을 쏟아 만든 팔만대장경이 처음 완성된 것은 1011년(고려 현종2년)으로 모두 6천권이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대장경을 조성할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교를 숭상하고 책을 사랑한 우리의 선조들은 그로부터 76년간에 걸쳐 8만권의 판각을 새기는 대역사를 이루어 냈다. 인류역사상 성을 쌓고 사원을 짓는데 장기간 국력을 소모한 일은 흔히 있었지만 책을 만드는데 이처럼 열과 성을 다한 나라가 일찍이 또 있었는가.
바로 그 인류의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지금 훼손되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책의 해」에 말이다. 하루 속히 손을 써야 할 것이다.<손기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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