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포기 무조건 비난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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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왜 할복자살을 안했는가.』끔찍한 질문이지만 이것은 50년대 말의 어느 날 아침 일본외무성 가와사키미주국장에게 걸려온 전화의 첫마디였는데 며칠을 계속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40년대초 그가 주미대사관 부영사 시절에 태어난 큰아들이 일본국적을 포기하고 미국국적을 선택한 공고가 관보에 실린 것을 보고 흥분한 국수주의자들의 발작이었다.
전화를 받은 국장의 답변은 명료했다.『아들이 미국에서 태어나자 대동아전쟁이 일어나 온가족이 미국 포로수용소에서 고생하며 미국교육을 받았으니 일본에서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만18세 되는 날 네가 알아서네 운명을 선택하라고 했다. 본인이 알아서 선택한 일이다. 국제사법은 국내법처럼 정책적인 필요에 의해 제정될 수도 없는 관습법의 축적이다. 혈통주의와 출생지주의의 마찰로 일어나는 국적선택은 어디까지나 본인 스스로가 결정해야 하고 그렇게 했을 뿐이다. 이것은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신성한 권리행사다.』
이 사실은 60년대 중반 주 아르헨티나 대사였던 가와사키가 『가면을 벗은 일본』이라는 책을 영어로 미국에서 출판함으로써 알려진 내용의 한 토막이다. 그는 일본의 절실한 국제화를 위해 일본인들이 반드시 고쳐야할 점을 용감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결과는 즉각적인 파면으로 나타났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의 책은 일본어를 비롯, 14개 국어로 번역돼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고 인세만도 봉급의 수십배에 이르렀으며 일본 최대의 기업인 미쓰비시는 그를 고문으로 영입했다.
우리나라메서도 요즈음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 1차 문민내각의 세 장관이 수난을 당했다. 다행히 한 사람은 구제됐다. 문제는 당사자가 국적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고등학교까지는 한국에서 다니다 부모의 주도로 국적을 선택해 특혜로 대학에 진학한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태어나 본인의 의사로 한국 국적을 포기했을 경우 무조건 범죄시하는 국수주의적 반응은 지나친 것 같다.
미국·유럽 등 국제적인 개방사회에는 이런 일이 다반사로 생활화되어 있는데 한국 국적 포기를 죄악시한다면 한국은 온세계로부터 북한이나 과거의 일본제국처럼 고립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부모의 간섭 없이 본인이 결정하도록 하면 된다. 이것은 당연한 권리행사이기 때문에 시비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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