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 최명란(1963- )
지리산 뱀사골 졸참나무 아래
풍욕하는 한 사내가 태(太)자로 누워 있다
맨몸을 낙엽 깔린 땅에 바싹 붙이고
하늘 향해 사지를 척 벌리고 드러누워 있다
아버지가 임종 전까지 꼭 쥐고 계시던 거
오줌 호스를 끼우기 위해 간호사가 건드릴 때마다
어설픈 한손으로 가리기를 먼저 하시던 거
그 늙은 소년의 수줍음이
거기 그 졸참나무 아래 솟아 있어
산다는 건 결국 사타구니에 점 하나 찍는 일
점이 무너지면 대(大)자로 뻗어버리는 일
깨벗고 꽈당 드러눕기만 하면 꼿꼿이 일어서는
풍욕도 도를 넘으면 성욕이 되는 건가
단단히 점 하나 콕 찍고 누웠다가도
낙엽 하나 툭 떨어지다 건드리면
태(太)자는 대(大)자가 되고 마는
읽다가 미소가 지나가면 나는 일단 좋은 시라고 여기는 버릇이 있다. 착각일까. 오늘 아침 나는 서느런 가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입추가 한 달도 얼추 남지 않았다. 이것들이 벌써 이 여름 속을 슬쩍 왔다간 것이다. 최명란 시는 갑자기 산처럼 슬퍼진다. 산다는 건 ‘대’자에 점 찍어 ‘태’자가 되는 걸까. 남자들의 이 점 하나씩의 첫 가을, 멀지 않았다. <고형렬·시인>고형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