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초가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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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초가을’ - 최명란(1963- )

지리산 뱀사골 졸참나무 아래

풍욕하는 한 사내가 태(太)자로 누워 있다

맨몸을 낙엽 깔린 땅에 바싹 붙이고

하늘 향해 사지를 척 벌리고 드러누워 있다

아버지가 임종 전까지 꼭 쥐고 계시던 거

오줌 호스를 끼우기 위해 간호사가 건드릴 때마다

어설픈 한손으로 가리기를 먼저 하시던 거

그 늙은 소년의 수줍음이

거기 그 졸참나무 아래 솟아 있어

산다는 건 결국 사타구니에 점 하나 찍는 일

점이 무너지면 대(大)자로 뻗어버리는 일

깨벗고 꽈당 드러눕기만 하면 꼿꼿이 일어서는

풍욕도 도를 넘으면 성욕이 되는 건가

단단히 점 하나 콕 찍고 누웠다가도

낙엽 하나 툭 떨어지다 건드리면

태(太)자는 대(大)자가 되고 마는


읽다가 미소가 지나가면 나는 일단 좋은 시라고 여기는 버릇이 있다. 착각일까. 오늘 아침 나는 서느런 가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입추가 한 달도 얼추 남지 않았다. 이것들이 벌써 이 여름 속을 슬쩍 왔다간 것이다. 최명란 시는 갑자기 산처럼 슬퍼진다. 산다는 건 ‘대’자에 점 찍어 ‘태’자가 되는 걸까. 남자들의 이 점 하나씩의 첫 가을, 멀지 않았다. <고형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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