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 (9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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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아마도 휴대전화에 내가 저장해 놓은 이름 ‘울 엄마’라는 단어가 뜬 모양이었다. 여기서 엄마 이야기가 나오자 아빠의 목소리는 다시 냉정해졌다.

“알아.”
 
아빠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엄마가 그래도 된다고 하디?” “그래!” 아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내가 소리를 지르며 대답했다. 아빠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래! 그러라고 했어. 엄마가 다 책임져 준다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
 
아빠의 입술이 얇게 뒤틀렸다. 그리고 아빠는 다시 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네 엄마가 책임을 진다니 하고 싶은 대로 해보거라.”
 
아빠는 내게 툭, 말을 던지고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물을 한 잔 마시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짓’을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빠가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입술을 앙다문 채로 눈을 감았다. 이럴 때 눈물이라는 것은 편리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으면 억지로라도 우는 척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진짜 눈물이 흘러나오자 나는 내가 정말로 많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다시금 다시금 엄마 식으로 말하면,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은 아빠의 ‘사랑’이었다. 아니, 사랑에 대한 정의가 모두 다른 것이라면 적어도 내 편을 들어주기를 바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 엄마가 나를 혼낼 때마다 아빠가 혼내는 것은 내가 아니라 새엄마였으면 했었던, 그런 마음이었던 것이다.
 
새엄마와 내 진술이 다를 때마다 아빠는 무조건 나를 믿어주었으면 했던 것이었다. 설사, 내가 아주 조금이지만, 아니 어떤 때는 조금 더, 아니 실은 더 많이 거짓말을 시켜도 새엄마의 말은 믿지 말고 오직 나만 믿어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그러자 진실은, 내 마음속의 분노의 실체는 고작 이따위라는 것을 깨닫게 됐고 엄마 말대로 그 유치함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유치한 것이 우리를 가장 아프게 한다. 밥이 그렇고 잔돈이 그렇고 아주 작은 따돌림이 그렇다.
 
“위녕, 아빠는 널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내 울음이 그치지 않는 것을 보자 아빠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널 이렇게 아프게 할 줄 알았다면 재혼도 하지 않았을 거고, 위현이도 낳지 않았을 거야…. 아빠의 말이 사실이라는 건 너도 알잖아.”
 
아빠의 목소리는 슬펐다.

“나는 차라리 아빠가 그 모든 것을 아빠를 위해서 했다고 했다면 이해했을 거야.”
 
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아빠가 놀라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빠의 행복을 위해서, 엄마랑 헤어지고 나서 정말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서 새엄마랑 결혼하는 거라고 했다면, 위현이를 낳은 것도 나를 혼내는 것도 언제나 새엄마의 편을 들었던 것도 다 아빠의 행복만을 위해서라고 했다면, 나는 적어도 아빠를 위해 참을 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아빠는 나를 위해서라고 말했어. 나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어.”
 
아빠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하지만 아니었어. 정말 널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게 널 아프게 하는 거라고 믿었다면 하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한 가지 정정할 것이 있는데 아빠는 언제나 새엄마 편을 들지는 않았어. 가끔은 네 편도 들었잖아.”
 
아빠가 마지막 말을 덧붙이는 것을 보자 그 와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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