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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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말로만 듣던 문민시대를 국민들이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는 것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청와대 주변도로와 인왕산 등산로의 개방일 것이다.
경무대로 불렸던 이승만대통령 시절의 청와대는 벚꽃이 만발하는 봄철이면 으레 대문을 활짝 열고 일반 시민들을 맞아들였다. 그래서 그 시절 서울시민들은 경무대의 벚꽃구경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뿐아니라 당시 경무대 맞은편 경복궁안의 구민속박물관 건물에서는 해마다 국전이 열렸는데,그 국전을 관람하기 위한 인파가 경무대 앞길을 온통 메우고 있어도 누구하나 막거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처럼 시민에게 친근감을 주던 청와대 앞길이 어느때부턴가 폐쇄되기 시작하더니 조금 있다가는 청와대 주변일대의 도로가 모두 통제되었다. 인왕산 등산로가 폐쇄된 것도 그 무렵이다. 청와대 앞길은 5공초기,6공초기에 잠시 개방된 적이 있었으나 인왕산을 개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인왕산이 이런 수난을 받는 것은 도성에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한양정도 당시 북악 주산론에 맞서 인왕산 주산론이 있었다. 차천로라는 사람이 쓴 『오산설림』에 이런 전설이 있다. 이성계가 임금이 된뒤 무학대사에게 나라의 도읍지를 물었다.
그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청룡·우백호로 삼으라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반대했다. 그러나 무학대사는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백년후에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2백년뒤 임란이 일어나 도성이 무너질 것을 무학대사는 예견했었다는 얘기다.
북악산은 산세가 뾰족하고 남산은 능선이 부드럽다. 그러나 인왕산은 북악처럼 모나지도 않고,남산처럼 밋밋하지도 않다. 그래서 예부터 인왕산은 시인묵객들의 좋은 벗이 되었다. 「인왕산에 해떨어지니 종소리 때를 알리네…」라고 읊은 성삼문의 인왕모종시도 그렇지만 겸제 정선의 『인왕 제색도』같은 그림은 인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그림이다.
그 인왕산이 문민시대의 첫 선물로 시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보다도 반가운 일이다.<손기상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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