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지 바꾼다고 권위서나/이상일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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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회는 23일 국회의원의 배지를 기존의 무궁화형에 자색 원판을 두른 지름이 0.2㎝ 축소된 1.6㎝ 크기의 새 배지를 만들기로 의결했다. 말 잘하기로는 소진·장의 못지않은 의원들이 이날 배지를 교체하기로 하면서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그럴듯하다.
즉,우선 기존의 배지는 너무 커서 권위주의적인 인상을 풍기는 만큼 부드럽게 바꿔야 하며,또 의원의 상징성도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혼자서만 반대했던 무소속의 원광호의원(한글 이름을 고집)이 지적한 것처럼 배지교체의 진짜 이유는 국회의원배지가 지방의회 의원의 그것과 유사해 서로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
다시 말하면 지방의회 의원들이 국회의원 배지를 모방하는 바람에 그들이 얼핏 국회의원으로 비쳐질 수 있는 반면,국회의원 자신들은 거꾸로 격이 한층 낮은 지방의회의원들로 오인돼 피해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배지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동안 국회의원들이 지방감사를 나가서 그 지방의회 의원들과 배지가 잘 구분이 안돼 몇차례 해프닝을 겪었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국회의원들로서는 내심 자존심도 상했을 것이고 권위가 훼손당한듯한 불쾌한 감정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감정과 약간의 신분상의 불이익을 십분 염두에 넣더라도 배지를 바꾸는 것은 썩 잘한일 같지는 않다. 우선 배지교체 발상의 밑바닥에는 도리어 형식에 치우치는 권위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는 느낌이다.
배지를 바꿈으로써 국회의원들의 지방의회 의원들과 신분·격을 가를 수 있고,권위도 제대로 찾을 수 있다는 착각이 헤아려지기 때문이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국회의원들이 배지 모양새보다 격조높은 의정활동에 신경쓴다면 권위는 절로 높아질 것이다.
또 지방의회 의원들이 바뀐 국회의원 배지를 재차 모방해 달면 어쩔 것인지 걱정스럽다. 또다시 배지를 바꾸지는 않을지….
배지를 바꿈으로써 의원들에게는 금배지 하나를 더 지급하면 되지만 헌 배지가 새겨진 국회건물의 각종 표시·기념품 등도 모두 교체해야 하는 예산낭비가 따른다.
국회의원들이 차제에 일본의원 빼고는 거의 달지않는 배지를 아예 없애기로 마음먹었다면 많은 국민들이 모처럼 신선한 충격을 받아 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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