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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5)제89화 내가 치른 북한 숙청(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남로당파 제거>(2)
「소련대사관 사건」이후 정국분위기는 급전직하로 냉각돼 갔다.
이 사건으로 그 동안 수면아래 잠복해 있던 「수상파(김일성 파)와 남로당파(박헌영 파)간의 암투」가 수면위로 부상했다.
노동당 선전부장 박창옥 등 수상파 간부들을 중심으로 남로당파 간부들의 동향과 종파적 경향, 회합, 불평불만 등에 대한 내사가 비밀리에 시작됐다.
그러나 이승엽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파 간부들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장유격대와 정치공작대의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에서 남조선에 밀파할 게릴라 요원 양성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박헌영 부수상이 소련대사관에서 「전쟁책임론」을 들고 나와 김일성 수상을 정면으로 공격한 이면에는 그럴만한 배경이 깔려 있었다.
소련대사관 파티가 있기 불과 며칠전인 51년 11월1일부터 4일까지 열렸던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 「당 단체들의 조직사업에 있어서 몇 가지 결점에 대하여」란 결정서가 채택됐다.
이에 따라 김일성 수상은 「백만 당원 만들기」를 당에 지시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결정서는 당 조직을 맡은 허가이 동지를 당에서 몰아 내기 위한 「판결문」성격이었다.
그러나 그 후속조치인 백만 당원 만들기를 눈여겨보면 석연치 않은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두뇌회전이 빠른 박헌영 부수상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그는 소련대사관 파티에 참석하기 며칠 전 남로당파 간부들에게 『평시도 아니고 전쟁이 절정에 달하고 있는 곤란한 상황 속에서 느닷없이 백만 당원 만들기를 추진하는 것은 허가이 동무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그가 이제 나를 잡기 위해 짜낸 「빨치산식 전술」하라며 경계심을 늦추지 말 것을 강조했었다고 한다.
문제의「백만 당원 만들기」는 당시 50여만 명밖에 되지 않는 당원을 배로 늘리는 작업이었다.
구체적으로 이 「운동」은 허가이 동지에 의해 숙당된 ▲전쟁 중 당원증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 ▲당의 허락 없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 사람 ▲유엔군 점령 하에서 지하공작 또는 빨치산 투쟁을 하지 않은 당원 등 10만여 명을 모두 사면해 복당시키고 특히 농민 30여만 명을 대거 입당시키라는 지시였다.
이 운동은 1년여 뒤인 52년10월1백%목표를 달성한다.
그러나 박헌영 부수상은 전쟁실패로 약화된 자신의 권력기반을 당세 확장으로 구축하려는 김일성 수상의 속셈을 꿰뚫어 냈다.
박헌영 부수상의 이 같은 분석의 이면에는 또 다른 배경이 깔려 있었다. 김일성 수상은 50년12월4일 자강도 만포읍 별오리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미군과 남조선군의 진격으로 자강도까지 쫓겨간 북조선지도부에서는 이같이 무모한 전쟁발안자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김일성 수상이 예고 없이 전원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그는 이 회의에서 「현 정세와 당면한 임무」라는 제목의 보고를 통해 『이번 전쟁으로 불순분자·비겁자·이단분자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지적하고 『이들을 당의 대열에서 일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패전의 책임을 최고사령관인 자신이 아닌 참모들에게 씌운 것이다.
이 회의에서 「불순분자」 등의 죄명으로 비판·강등·투옥 후 총살된 사람은 연안파의 무정(제7군단장·중장), 김한중(사단장·소장), 소련파의 김열(전선사령부 후방 총국장·소장), 채규형(최고검찰소 부총장), 남로당파의 허성택(노동상 겸 남조선 빨치산조직 책임자), 빨치산 파의 김일(전선사령부 군사위원·중장), 임춘추(강원도 당 위원장) 등이었다.
이 회의에서 지적된 무정의는 이러했다.
무정은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평양방위를 포기, 적에게 평양을 넘겨주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동북부로 도망갔다..
그는 특히 도망갈 때 다수의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전쟁과 함께 2군단장에 임명된 무정은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북한의 지도부와 인민군이 패주할 때 평양방위사령관에 임명됐다가 도주, 패잔병들을 긁어모아 중국에서 제7군단을 편성해 지휘하다 소환돼 이 같은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당시 강원도당 부위원장이던 나는 당원·민청회원·여맹회원·도민 등을 데리고 중국으로 후퇴, 상부의 명령에 따라 이들을 무정에게 넘겨주고 북조선의 임시지도부가 있는 강계로 내려가 있다가 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무정 장군은 무장군인들에 의해 군복이 벗기운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한참 후 그는 수인들로 구성된 「건설대대」의 대대장이 되어 평양시내 건설공사에 투입됐으나 중국의 요청으로 신병이 중국 측에 넘겨졌고 그 후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정 장군의 후임으로 제7군단장은 제3사단장이던 소련파 이영호 소장(53년 민족보위성 부상, 다시 해군사령관 등으로 승진)이 승진 전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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