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시각으로 개혁작업 나설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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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국제적으로 탈 이념이 된 지금도 아직 펄펄 살아 움직이는 사회가 있다.
동구나 한국과 같이 하나의 이념이 일방적으로 지배하던 사회에서는 여전히 이념이야말로 그 위력이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특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동구에서는 서구의 이념으로 옮겨가 보겠다는 열망이 그 지역 개혁작업의 중심 생각이 되어 있고, 한국에서는 보다 진보적·자유주의적 이념으로의 이행이 개혁작업의 요체가 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동구에서는 우경화, 한국에서는 좌경화로의 이행여부가 개혁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 동구나 한국이나 한쪽으로 편중되고 경시되었던 생각·관행·사회구조를 중간 쪽으로 바르게 세워서 잡아 나갈 수 있느냐에 개혁 성패가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건 민주 대 반민주 구도와는 별개 문제다. 우리의 보수주의는 백색에서 흑색·회색에 이르는 모든 색깔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래서는 진보의 고유한 색깔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보수의 색깔마저 희미해지고 만다. 상대의 이념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이념까지도 포기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이로니컬 하게도 이념의 독점은 이념의 부재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개혁에 가장 필요한 정책사이의 대치 성을 죽여 버리는 결과도 가져오게 된다.
쉬운 말로 얘기하면 개혁이란 스스로의 개체를 내정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상충되는 상대의 입장을 수용함으로써 이쪽의 생명을 활성화시킨다는 목적이 더 강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정한 목표와 수단을 가지고 진행하는 개혁은 십중팔구 실패하게 마련이다.
개혁은 인원사항을 잡동사니로 모아 놓고 해결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개혁의 전략으로 보아 자의성을 동원해서라도 이런 색깔을 분류해 놓아야 개혁의 범위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날 수 있다.
개혁작업에 절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찬·반의 격렬한 입장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긴장, 그리고 다른 쪽의 입장을 받아들임으로써 또는 이쪽의 입장을 꺾음으로서 생기는 국민적 갈등과 그의 해소 및 여기에서 생기는 이완, 이런 과정들이 개혁과정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국민들이 대립되는 이념적·정치적 입장에 대해 판별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게 되고 그럴 수 있을 때에만 개혁의 극적 효과(국민적 감동과 승복)를 갖게 된다.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중량을 적정한 수준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교정해 나간다면 우리는 선진국수준에 오르고 그 정도의 자유화작업(Liberalization)만으로도 개혁의 성공은 보장된다고 본다.
보수적 가치와 사회구조·분배·사회정의 면에서 지나친 보수성을 깎아 내고 진보 성을 도입하는 일, 이것이 우리시대의 요청이기도 하고 차기정권의 개혁작업의 성패를 쥐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고 본다.
허경구<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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