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 진지한 장편 잇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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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정통 소설문법에 충실한 젊은 작가들이 신과 존재, 사랑, 그리고 우리 시대의 의미를 묻는 진지한 장편들을 잇따라 펴내고 있다.
최근 문형렬씨는 장편 『그리고 이 세상이 너를 잊었다면』(자유문학시간), 이승우씨는 『생의 이면』 (문이당간), 이남희씨는 『산 위에서 겨울을 나다』 (중앙일보사간)를 펴냈다.
『그리고…』는 84넌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소설계에 나와 소설집 『언제나 갈 수 있는 곳』 『슬픔의 마술사』 등을 펴내며 부조리한 세계에 맞선 밀도 높은 정신의 순결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문씨의 첫번째 장편. 세계적 고전으로 꼽히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기대 사랑과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화자인「내」가 친구인 신학생 알베르토와 그의 애인 아네스의 죽음으로 마감한 사랑을 회상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80년대 초 명문대에 입학한 알베르토는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과 머리를 지배했던 사회 정의나 이념 등을 떠나 신학 서적에 몰두하다 결국 신학생이 된다. 순결한 아네스를 사랑하게된 알베르토는 그녀가 불치의 병으로 죽자 그 역시 자살하고 만다는 줄거리를 그들의 일기와 편지, 그리고「나」의 회상 형식을 통해 그리고 있다. 『폭풍의 언덕』이 저주받은 사랑에 시달리는 한 인간의 극점, 인간의 악마성을 그린 반면, 『그리고…』는 순결한 사랑과 자기회생을 통한 구원을 그리고 있다는데서 문씨의 「정신적 순결성 추구 작업」을 집약한 장편으로 읽힐 수 있다.
81년 한국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일식에 대하여』 『에리직 톤의 초상』등으로 인간에 대한이해와 성찰이 담긴 진지한 주제로 독특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 이승우씨의 『생의 이면』은 3개의 중편과 연대기로 구성된 연작 형식의 장편. 아버지의 정신분열증과 죽음. 그에 뒤따른 어머니의 개가라는 어린 시절의 정신적 상처로 인해 폐쇄공포증을 가진 주인공이 운명적인 사랑과 신에로 나감으로써 그 상처를 승화시키고 있는 이 작품은 신학 대학과 대학원을 나온 이씨의 자전적 소설로 읽힐 수 있다.
86년 여성 동아 장편 공모에 『저 석양빛』이 당선돼 문단에 나온 이남희씨의 『산 위에서 겨울을 나다』는 이념이 퇴색하고 새로운 대안이 부재한 현실을 살아가는 다양한 젊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때 이념의 깃발을 따라갔던 젊은이들이 이제 깃발 없는 상태에서 겪는 실존적인 고뇌를 다루며 고도 산업 사회의 그 황폐한 모습도 드러내고 있다.
현실 문제에 대한 고발과 비판으로 민중 문학 계열에 서있는 이남희씨가 『우리 시대의 청춘 송가를 쓰겠다』며 내놓은 이 작품을 통해 80년대 민중 문학 이념의 전면에서 물러나 이제 사회의 구석구석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90년대 민중 문학의 한 방향을 엿볼 수 있다.
한해를 마감하면서 나온 젊은 작가들의 진지한 주제와 방법의 소설들은 표절과 외설 시비로 얼룩졌던 92년도 문단의 우려를 거품·표면 현상으로 돌리고 인간과 사회의 반성으로서의 훌륭한 작품들에 의해 여전히 우리 문학은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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