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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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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본 오사카에 있는 스포츠용품 업체 미즈노 본사에 아주 특별한 수선 의뢰가 2005년 말 접수됐다. 배달돼 온 물품은 가죽이 반들거릴 정도로 닳았고 색깔도 거무튀튀하게 변한 골동품급 야구 글러브였다. 손등 쪽에 R. R. Mizuno 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창업자인 미즈노 리하치와 리조 형제의 이니셜이었다.

수선을 의뢰한 사람은 토머스 시퍼 주일 미국 대사. 전설의 메이저리그 타격왕 루 게릭이 현역 시절 사용하던 것이란 설명과 함께였다. 1930년대 홈런왕, 타격왕, 타점왕을 합쳐 아홉 차례 석권한 뉴욕 양키스의 4번 타자, ‘근위축성 측소경화증’이란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지금은 자신의 이름이 그대로 병명(病名)이 돼버린 바로 그 루 게릭이다.

미즈노의 조사 결과 31년 메이저리그 선발팀에 뽑혀 일본에 온 루 게릭이 다음 시즌부터 미즈노 글러브를 사용하겠다고 말한 기록이 발견됨으로써 시퍼 대사의 말은 사실로 입증됐다. 당대의 타격왕이 본고장의 것을 제쳐놓고 일본 제품을 애용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미즈노의 전통과 기술을 입증해 줄 자랑거리임에 틀림없다. 지난해 창업 100년을 맞은 미즈노는 지금도 야구 글러브를 생산해 세계 각국에 내다 판다.

하지만 연륜에 관한 한 미즈노도 일본에서 자신있게 명함을 내밀 수준은 못된다. 창업 300~4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장수 기업’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사찰 전문 건축업체 곤고구미(金剛組)는 무려 1400년째 본거지인 오사카에서 영업 중인 세계 최고(最古) 기업이다. 한때 콘크리트 건설 쪽으로 사업 확장을 했다가 폐업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다. 창업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초빙돼 온 기술자였다는 사실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돼 있다.

일본에서 창업 100년 이상의 업체는 1만5000개사에 이른다. 개인 경영 상점을 제외한 숫자다. 일본 실천경영학회에 따르면 200년 이상의 기업도 3000개에 이른다. 나머지 아시아 국가에서는 중국 9, 대만 7, 인도 3개사밖에 없고 자본주의 발상지인 유럽에서도 독일 800, 네덜란드 200여개사 정도다. 한국은 지난해 창업 110년을 맞은 두산이 최장수 기업이다.

기업이 100년, 200년을 버티는 비결은 무엇일까. “본업의 강점을 활용해 끊임없이 개량할 것. 그러나 급격하게는 하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하라.” 일본의 장수 기업들이 앙케트 조사에서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다.  

예영준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