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장(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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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우리 전통사회에는 오늘날의 연하장에 해당하는 세함이라는 것이 있었다. 글자의 의미 그대로 「명함으로 세배를 드린다」는 뜻이다. 집안 어른이나 웃분에게 새배를 드리러 갔다가 주인이 부재중인 경우 「아무개가 다녀갔다」는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다. 그래서 세배받을 사람이 부득이한 일로 외출하게 되면 하례객을 위해 책상위에 지필묵을 마련해두는 것이 상례였다.
세함이 오늘날의 연하장으로 차츰 성격이 바뀌게 된 까닭은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꼭 세배를 드려야 함에도 찾아뵙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우편제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세함의 배달을 하인들이 맡았다.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가정부인들은 여종들을 시켜 세함을 전달하도록 했다. 그 여종을 일컬어 문안비라 불렀다.
서양에서 명함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의 일이고,우리네의 연하장에 해당하는 크리스마스 카드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도 19세기 후반부터의 일이었으니 새해인사에 관한한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답게 서양보다는 훨씬 앞섰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연하장으로 대신하는 새해인사가 우편제도의 발달과 함께 마치 유행처럼 번져 「겉치레 연하장」의 폐해를 낳고 있다. 12월부터 1월초에 이르는 기간동안 우편물이 평소의 두배를 넘는 4억여통에 달한다니 최소한 2억통 이상이 연하장인 셈이다. 물론 보내는 사람의 따뜻한 마음과 정성이 담긴 연하장도 없지는 않겠지만 상당수의 연하장들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들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름쓰는 일조차 귀찮아 육필은 없이 인쇄뿐인 연하장이 대부분인 것도 오늘날 연하장의 의미를 대변한다. 그래서 개봉도 않은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연하장도 적지 않다. 대단한 낭비다.
한 기업체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중 39%가 받자마다 보지도 않고 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말할 나위없이 보내는 사람의 따뜻한 마음과 정성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해인사의 진정한 뜻이 담겨져 있다면 그 연하장은 오래 간직할 가치가 있다. 차라리 옛날의 세함이 그립다.<정규웅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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