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어른」이란 우리말은 음미할수록 재미있는 말이다. 옛날에는 시집·장가가서 상투를 틀거나 머리를 얹어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성인이 되었다는 뜻 이외에 다른 뜻은 없다. 정말 「어른」소리를 들으려면 나이가 지긋해지고 경륜도 쌓여 다른 사람의 수범이 돼야 한다.
그래서 우리 속담엔 「어른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은 어른이 시키는대로 하면 실수가 없을뿐 아니라 여러가지로 이익이 된다는 뜻이다. 반대로 「어른 없는 데서 자랐다」는 말은 버릇없이 방자하게 구는 사람을 멸시하는 뜻으로 쓰였다.
이같은 어른들 가운데서도 사회나 국가의 지도급에 있는 인사들을 우리는 흔히 「원로」라고 부른다. 사전적 해석으로는 관위·연령·덕망이 높은 공신,또는 오랫동안 그 일에 종사해 공로가 있는 연로자다. 따라서 우리는 원로라는 어휘에서 자기이익보다는 집단의 이익,집단의 이익보다는 사회나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지혜를 읽게 된다. 원로의 말은 결코 명령이 아닌 충고다. 하지만 그 말이 어떤 강제된 명령보다 권위와 무게를 갖는 것은 바로 그 덕망과 경륜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사회에서는 원로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원로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물론 원로가 원로다운 처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있지만,우리사회가 원로를 원로로 인정하지 않고 저마다 「용의 꼬리」보다는 「닭의 머리」가 되겠다는 소영웅주의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 오래 근무한 일이 있는 한 외교관의 말이 생각난다. 일본의 경우는 은퇴한 외교관이라도 그가 근무한 경험이 있는 나라의 일이 생기면 언제나 다시 불러들여 그의 지혜를 빌린다는 것이다. 마치 다 쓴 치약을 다시 짜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쓰다만 치약을 버리듯 인재를 마구 버리는 경우를 흔히 본다. 인물을 아끼고 키우지않는 풍토에서 어찌 원로가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느사회나 그 사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원로는 있다. 바로 지난주 56명의 원로들이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모여 공명선거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원로들의 말을 모두 귀담아 들어야할 것이다.<손기상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