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만든 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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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사람들은 병이 나면 치료하기 위해 병원으로 의사를 찾아간다. 그런데 그 의사로 인해 병이 치료되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병을 얻게 되거나 더 악화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의사가 만능이 아닌 이상 실수나 오진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꼭 의사에 의해서 만도 아니고 병원 자체의 미흡한 설비나 준비부족으로 오진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요즈음 큰 관심거리로 되어있는 수혈을 잘못 받아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에 감염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라 하겠다. 의학용어에서 이아트로제닉(Iatrogenic)이란 말이 바로 「의사가 만든 병」이란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셈이다.
의사를 찾아 갈 때는 법을 치료할 목적이었는데 오히려 병을 더 얻게 된다면 그보다 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일이 본의는 아니지만 의사 자신도 모르게 나타날 수 있고 설령 의사가 스스로 알더라도 의사 자신이 고의적으로 묵살해 버린다면 환자 자신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사들의 의학적 지식이나 기술 못지 않게 도덕성 문제도 중요시된다.
의사들의 도덕성에 관한 것은 어디까지나 의사 자신들의 양식문제이기 때문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한다. 의사들의 도덕성 문제나 기술적인 미흡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법적인 절차에 의한 방법밖에 없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의학담당 전문 변호사들이 따로 양성되어 있다. 이런 전문 변호사들의 활발한 활동에 의해 의사들이 많은 시달림을 받고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런 시달림을 받지 않기 위해 의사들이 자기 계발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과 수련을 하는 동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환자도 의사도 모두 너무 쉽게 쉽게 적당히 넘어가고 있다. 환자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내 팔자지』하며 체념하고 의사들은 그것이 마치 필연적인 사실로 무신경하게 넘겨버리려 한다. 우리사회 전반에 만연돼 있는 적당주의에 대한 하나의 표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의료문화에까지 이런 적당주의가 통용된다면 환자들의 불행이며 의사들에게도 비겁함을 조장하는 일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최상묵<서울대 치대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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