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노 대통령, 선관위 경고 겸허히 수용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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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어제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법을 일부 위반했다고 판단하고, 선거 중립 의무를 준수하고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공정한 선거관리를 총괄해야 할 국정 최고책임자가 특정 정당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예비후보를 폄훼한 것은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선거 중립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고 선관위의 지적을 받은 게 이번으로 두 번째다. 2004년에는 선관위의 경고를 근거로 탄핵 심판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독립적 헌법기관들의 결정을 외면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은 심각한 권력 전횡(專橫)이다.

청와대는 선관위의 결정에 불복, 법적 대응을 계속하겠다고 위협해 왔다. 그 방법으로 검토해 온 것이 헌법소원과 권한쟁의 심판 청구다. 하지만 두 가지 다 적절치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헌법소원을 청구할 수 있는 건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로 인하여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받은 자'(헌법재판소법 68조1항)다. 공권력의 최고 주체인 대통령은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또 기관 간의 권한을 조정하는 권한쟁의 심판도 자연인 노무현의 정치적 자유를 다루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공직선거법(9조)상 정치적 중립 의무를 지는 공무원이라는 것은 헌법재판소가 2004년 이미 합헌으로 결정하지 않았는가. 다른 조항들도 결국은 이 판단을 근거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 문제를 다시 헌재에 들고가려는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대통령의 선거 중립 의무를 둘러싸고 선관위와 처음 논란을 벌인 2003년, 헌재가 합헌 결정을 한 2004년 이후에도 얼마든지 시간이 있었다. 만약 선거법이 부당하게 대통령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면 그때 정면으로 선거법 개정을 내걸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이제껏 방치하다 또다시 위법 행위를 저지른 뒤 그 법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처신이다. 누구든 불법을 저질러 놓고 헌법소원을 청구하면 합법이 되는 건가. 이런 사정을 훤히 알고 있을 청와대가 이 문제를 헌재로 가져가겠다는 것은 공직선거법을 위헌 논란의 한가운데 놓아 무력화하고, 사실상 '무법(無法)' 상태에서 마음대로 차기 대통령선거에 끼어들겠다는 속셈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할 의무가 있다. 그 하위 법률을 포함한 법질서를 지키는 책무다. 임기 말 노 대통령의 최대 임무는 공정한 선거관리다. 스스로 앞장서 선거법을 흔들고, 위법 행위를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누구에게 법 준수를 요구하고, 선거 관리는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대통령은 선관위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이라. 겨우 3년 전 헌재 결정 이후 판단이 달라질 아무런 상황 변화도 없다. 그래도 노 대통령이 굳이 법적 쟁송을 강행하겠다면 헌법재판소는 결정을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 그래야 법을 무시하는 권력자에 의해 선거판이 훼손되는 불행한 기간을 줄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