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청풍호 수면에 비치는 비봉.
세간(世間)의 쇄사(事)에 번심(煩心)이 일었는지, 수격삼천리(水擊三千里)라 장생(莊生)이 말한 대붕(大鵬)의 위세에 짓눌렸는지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베란다에 나가 일도징강(一道澄江)에 비치는 월악(月岳) 영봉의 효색(曉色)을 바라보니 채색 아닌 수묵의 농담이 끝없이 춤을 추건만 그 선경(仙景)의 적정(寂靜)을 깨는 것은 와공(蛙公)의 합창이로고. 신휘(晨暉)를 가르는 새벽닭의 울음소리는 와공의 합창을 잠재우고 온갖 산조(山鳥)의 지저귐을 유도하건만, 세파(世波) 탓인지 오심(吾心)의 비감(悲感) 탓인지, 계명(鷄鳴)은 창랑(暢朗)치 아니하고 피 토하는 계면일 뿐이로다. 무엇이 저토록 처창(悽愴)할꼬! 먼동이 트자마자 개벽의 서광을 따라 금수산 신선봉 계곡을 올랐다. 십리가량이나 점입소로(漸入小路)하는데 갓 돋는 녹엽(綠葉)을 투과하는 조광(朝光)의 빛줄기들은 계곡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마저 녹색으로 물들이고 만다. 어찌 삼신산(三神山)이 따로 있으랴!
아침 햇살이 거대한 산세를 살포시 누를 즈음, 깎아지른 바위길 틈새를 굽이 돌아 올라서니 "으악!" 입에서 나오는 건 경탄(驚歎) 일성(一聲)일 뿐이었다. 내 회갑(回甲) 일생애(一生涯)에 내변산 월명암의 낙조에 탄성을 지른 적이 있고, 백암산(白巖山) 운문암(雲門庵)의 탁 트인 경관에 비선(飛仙)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지만, 이곳 정방암(淨芳庵)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충격은 영주 부석의 시감(詩感)을 압도한다. 아차(峨嵯)한 절벽의 석금(石琴) 아래 한 자락에 간신히 얹혀놓은 듯한 정방사는 의상(義湘) 문하의 고승 정원(淨圓)이 의상이 공중에 던진 지팡이를 따라가다 이곳에 안착하여 생긴 향기로운(芳) 암자라 하여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 조촐한 법당에 걸려 있는 주련이 그 수려한 가람의 품격을 더해준다.
高無高天還返底 높음이 하늘보다 더 높은 것 없으나 도리어 아래로 내려가고
淡無淡水深還墨 맑음이 담수보다 더 맑은 것 없으나 도리어 깊어 검디검도다
僧居佛地少無慾 스님은 부처님 정토에 거하니 욕심이 있을 수 없고
客入仙源老不悲 객은 신선의 근원에 들었으니 늙음 또한 슬프지 않구나!
나는 이 주련을 보자마자 한 수 읊었다.
淨圓覺義石琴鳴 정원의 깨달은 뜻 저 석금이 울어대고
仙境又仙却歸俗 선경이 더욱 선하니 오히려 세속과 분별이 없도다
大美不言時不議 천지의 이 큰 아름다움은 말이 없고 사시의 흐름도 담론을 떠나 있건만
談世小人不盡曲 세상을 말하는 소인배들의 왜곡은 끊임이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