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리부] 젊은 작가 8인展 "미술이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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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미술관 학예연구원들이 2년마다 선보이는 '아트 스펙트럼' 철이 돌아왔다. 한국 현대미술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2001년에 만든 이 기획전은 특정 주제 없이 학예연구원들이 뽑은 작가들의 새 작품을 한자리에서 충실하게 보여준다. 19일 시작해 내년 2월 29일까지 이어지는 올 '아트 스펙트럼'은 한층 젊은 작가 얼굴에 다양한 작품 세계가 뒤섞여 맛깔스러운 뷔페 식탁을 떠올리게 한다.

'아트 스펙트럼 2003'이 열리고 있는 서울 순화동 호암갤러리는 1층에 6개, 2층에 한개 방이 말 그대로 한국 미술계 한 모퉁이를 절개해 차례로 세운 것 같은 빛깔 띠로 늘어섰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8명의 작가가 방 하나씩을 맡아 선보인 한국 미술의 단면도는 화려하면서도 단아하고, 여린 듯 단단하다. 이들 손에서 우리 미술이 익어가고 있다는 믿음이 솟는다.

전시장 들머리에서 보는 이의 눈을 자극하는 화면 주인은 정수진(34)씨다. 캔버스를 빼곡하게 채운 만화풍 사람들이 켜를 쌓듯 산을 이루고 그 사이사이를 줄줄이 사탕처럼 도형으로 엮은 작품 제목은 '진통제'다. 한 치의 빈 틈도 놓치지 않겠다는 화가의 강박과도 같은 집념이 그의 그림을 일종의 정신적 진통제로 만들고 있다.

천천히 다음 방으로 건너가면 박세진(26)씨가 아득한 풍경화를 펼쳐놓고 기다린다. 오물오물 작은 점들과 수많은 묽은 붓질이 망설이듯 구축한 낭만 풍경 속에 조그만 인물 하나가 자연 속을 지나가고 있다. '길 아닌 길'에 대한 동경이 그 어깨 너머로 이어진다. '나른한' 탈주의 욕망이 한 발 한 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박미나(30)씨와 사사(31)씨가 함께 구성한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까?'는 사고 쓰고 먹고 싸는 소비생활의 끝없는 욕망 구도를 상품 진열대로 상징한 설치작업이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현대인의 과잉을 역설로 치고 들어온다.

지루할 정도로 평범한 식탁이나 실내 한 모퉁이에 카메라를 밀착시킨 이윤진(31)씨의 사진은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일상의 공간을 튕겨준다. 그'정물'이 품은 표정과 이야기 속에 우리 일생 전부가 묻혀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무심하게 묻는다.

문경원(34)씨는 사람 드로잉으로 이미 자신의 이미지를 지은 작가다. 플래시 애니메이션 형식에 음향을 더해 선보인 '뉴스 놀이'는 징그러울 정도로 꼼꼼한 손작업에 힘입어 생생한 일상성을 일구고 있다.

한기창(37)씨가 내놓은 '뢴트겐의 정원' 연작은 재료와 형식에 내용까지를 두루 잘 버무린 작품으로 높고 넓은 호암갤러리 공간을 장악한다. 병원에서 거둔 엑스레이 필름을 짜맞춰 상처와 죽음을 연상시키는 창백한 빛깔의 사군자로 피워올린 발상은 패기만만하다.

2층을 넓게 차지한 이한수(36)씨의 '팬시 니르바나'에 오면 드디어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가상현실이 만나는 미술 현장이 펼쳐진다.

레이저 속에 찬란하게 빛나는 보살상이 전통과 현대, 동과 서, 무거움과 가벼움을 엮는다. 이제까지 20세기 미술의 전통에 발을 붙이고 통로를 따라온 관람객들이 미래로 뛰어드는 순간이다. '아트 스펙트럼 2003'은 '미술이 무엇인가'를 묻는 여정이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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