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닭목령 진달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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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닭목령 진달래' - 박세현(1953~ )

봄밤에 누워 꽃 생각에 설렌다

어떤 놈은 피고 어떤 놈은 지던

부신 몸짓들

몸을 돌려 누이며 생각하니

이 봄엔 시 한 편 못 쓰고 보냈다

어디다 핑계를 댈까, 궁리하며

낮은 베개 위에서 빈둥거리는데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닭목령에서 옆눈으로 만났던

원본(原本) 진달래 더미가

봄물살처럼 긴급으로 밀려와

잠 끝에 뿌리를 내린다

멀리 있던 혼들도 천천히 돌아와

문지방에 맑은 얼굴을 비벼대는 순간이다

간밤의 꿈속이 밝았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싶을 때가 있느니


원본 진달래에게 편지를 부치고 온다. 복제 이미지들의 홍수인 시대, 원본 편지가 원본 진달래에게 도착하지 않더라도 깨끗한 손을 가진 한 사람을 기다린다. 내가 사랑한 원본들의 주소를 뒤적인다. 이 봄엔 시 한 편 안 쓰고 보냈다. 시를 안 쓰고도 화답시 쓰는 마음으로 원본 진달래 꽃잎 속을 뒤적였다고 할까. 꿈속이 밝다.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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