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성의 찡한 우정 다룬 명품 뮤지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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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20면

세 여자가 있다. 한 명은 성폭행을 일삼아 온 의붓아버지를 죽여 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돌아온 괄괄한 아가씨 펄시(조정은 분)다. 또 한 명은 길리아드라는 조용한 마을에서 ‘스핏파이어 그릴’이란 낡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꼬장꼬장한 70대 할머니 한나(이주실 분). 나머지 한 명은 한나의 조카 며느리로, 착하지만 우유부단하고 의기소침한 쉘비(이혜경 분)다. 큰 줄거리는 세 여성의 우정이다. 걸핏하면 오해하고, 때로 딴청을 피우며 투닥거리지만 서로의 상처와 가슴을 받아들이며 차츰 ‘친구’로 변해 가는 셋의 일상을 그려 간다. 어찌 보면 상투적인 얘기이건만 드라마의 디테일은 살아 있고 찡하게 마음을 당긴다.

라이선스 뮤지컬이긴 해도 ‘스핏파이어 그릴’은 한국 뮤지컬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빅뱅’이란 소리만 요란할 뿐 내실은 기하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한국 뮤지컬에 대한 우려를 단숨에 걷어낼 만한 수작이다. 강요와 유치함ㆍ목적의식의 탈을 깨고 퀄리티와 세련됨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미덕은 음악이다. 왜 뮤지컬이 연극이 아닌지 확실히 보여 준다. 극의 전개는 노래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다. 한국 뮤지컬의 고질적인 병폐로 꼽히는 연기 따로, 노래 따로 식의 ‘단순한 2분법’과는 분명 거리가 멀다. 곡의 고조와 장단에 맞춰 가사는 입에 착착 감기며 객석의 귀를 파고든다. 노래만으로도 스토리를 이해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선 노래를 불러야 오히려 더 제 맛이 나는 듯싶다. 어쿠스틱 기타와 아코디언, 바이올린과 첼로의 악기 구성은 단출해 보이지만 넘치지 않은 채 풍성하게 무대를 감싼다.

무대는 단일 세트다. 스핏파이어 그릴 식당 내부만을 비춘다. 그래도 때론 환한 조명으로, 혹은 멀리 비추는 빛으로 무대는 여러 소리를 낸다. 단정하며 은은하다. 진지한 드라마와 정서적 여운을 연결하는 빛의 미학임에 분명하다.

거친 음색으로 탈바꿈한 배우 조정은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반갑다. 단 아직도 연기력에서 미흡한 몇몇 배우는 다소 안타깝다.

무엇보다 극적 반전을 이뤄내 ‘쿵’하는 울림을 주어야 할 마지막 부분이 밋밋하게 처리된 점은 아쉬울 따름. 그래도 이만 한 ‘명품 뮤지컬’을 만날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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