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칼럼] 말의 정치 그만둬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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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앞으로 열흘이 지나면 계미년을 보내고 갑신년 새해를 맞이한다. 내년 2004년은 갑신정변 이후 회갑을 두 번째 맞는 해다. 또한 현 참여정부 2차연도이고 17대 국회를 새로이 선출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새해를 바라보는 우리의 정치.경제 및 주변상황은 구한말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매우 혼란스럽다. 정치를 책임져야 할 여야 정당들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보다 예견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헤매고 있고,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는 지나친 여론 의식으로 각종 현안 해결을 위한 정책 결정에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민은 정부정책을 불신하고 있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다.

*** 10개월 혼돈 왜 시스템 탓인가

물론 민주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에 국민의 여론수렴이 필요하지만 최종 의사결정자의 독자적인 판단 없이는 국정은 장기간 표류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 임기 5년은 긴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준비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큰 것이다.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청중 앞에 등장해 연주 전 단원들과 조율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관중은 야유를 보내거나 지루하여 자리를 뜨게 된다. 그래서 성공한 지휘자가 되려면 관현악단원의 구성을 유능한 연주자들로 해 잠깐의 화음을 맞추고 연주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국민은 대통령의 취임 후 짧은 시간 내에 국정의 청사진이 제시되고 이에 따라 국정이 순조롭게 이행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국민은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되고 그 결과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계속 하락하게 된다. 이것이 현재 참여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겨우 대통령이 취임한 지 10개월밖에 안 되어 정부는 국민이 너무 성급하다고 항변할 수 있고 시스템이 가동되려면 얼마간의 인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변명이 될 수 없다. 국민은 국정수행에 대한 구상은 이미 대통령 후보 시절에 이뤄졌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선거공약이 만들어져 2개월의 취임 준비기간 중에 조율이 완료됐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시스템은 사람들로 구성돼 있고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는 주체도 역시 사람이다. 시스템이 잘못 구성됐거나 운영주체가 능력이 없으면 그 시스템은 효율을 발휘할 수 없다. 국정수행이 제 길을 가지 못하고 정체의 늪에 빠져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현재의 시스템을 재점검하고 효율을 위한 수술을 단행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의무다. 이를 통해서만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 및 사회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고, 그 결과로 현 정권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증가할 수 있다.

오늘의 사회는 지식의 폭발적인 증가와 정보의 홍수, 높은 교육수준과 합리적 사고의 증가,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정성에 대한 민감함 등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층은 구체성 없고, 실현성 없는 구호만으로 국민을 조작하고, 현혹하고 지배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에 기초한 국정운영만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 정치·사회 변화 과감히 수용하라

아직도 정부나 정치인들은 말로는 지식사회와 정보화 사회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이러한 사회에 어떻게 스스로를 변화하고 적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지 않고, 국민이 느끼고 바라는 바에 역행하는 정권이나 정당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이 역사의 교훈이다.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는 정권이나 지도자는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다른 나라 지도자들이 국가를 발전시킨 성공사례들을 무수히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헌정 55년 역사에서 성공한 지도자의 모습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정치는 행동하는 철학"이라고 했다. 지도력은 확신에 찬 지도자가 나라가 직면한 정치.경제.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부딪쳐 해결하는 행동에서 발휘된다. 다가오는 갑신년에는 말의 정치 대신에 확신의 정책이 펼쳐지기 바란다. 이제는 구변(口辯)으로 보낼 시간이 없다.

김종인 前청와대 경제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