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라연의 「5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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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근래 사람들이 자주 탄식하는게 있으니,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삭막하다는 것이다. 원인이야 실상 한둘이 아니지만 그 으뜸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사랑의 결핍, 또는 부재일 것이다. 사랑의 구현이야말로 인간다운 삶과 살만한 세상의 기초다.
그런즉 사랑을 시적 조형의 목표로삼는 시인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덮어놓고 탓할 것은 못된다. 다만, 엇비슷한 가락으로 청중의 귀를 괴롭히는 사랑가가 아니라 독특한 창법으로 청중의 가슴을 흔드는 사랑가가 많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의 이런 소망에 잘 부응하는시인이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의 박라연씨다.
그는 상상력을 기민하게 발휘, 혹은 변주하면서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근작시「5월」(『현대문학』8월호)도 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이시는 5월어느날「문득,/저주받은 언덕에 오르고 싶다」는 충격적인 화두를 던져 독자의 이목을 강하게 끌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화두를 꺼낸 화자가 이 시에서 드러내고자하는 것은 무엇일까. 화자는 먼저 오랜 세월 동안 노출하지 못했던, 혹은 하지 않았던 「꽃신」에 스스로 불을 지르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보여준다. 이 꽃신의 정체는 그 어떤 욕망이나 신념일수도 있겠으나 그의 시세계를 차분히 살펴보면 그것은 곧 사랑이라는게 드러난다. 즉 시인은 사랑의 불꽃을 피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꿈꾸는 사랑의 꽃이 어찌 절로 개화할 것인가. 그 꽃이 탐스럽게 피려면 그 순과 뿌리는 한동안 하늘과 땅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그래서시인은 「새순들은 하늘의 봄을 돌아/초여름의 지하 수천미터 숲속까지 껴안는」이란 기발한 시행들을 배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가 표면적으로 강렬하면서도 비극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의 많은 시가그러하듯 온갖정성을 다 기울여 그 누군가를, 혹은 그 무엇인가를 헌신적으로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박씨의 시는 일찍이 문화평론가 김주연씨의 지적처럼 헌신적 사랑을 그나름의 개성적인 화폭에 담아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좁히고, 그리하여 이 세계를 살만한 공간으로 만들려고 정진하는 사람의 시라는게 거듭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그런점에서 박씨는 90년대시의 활력과 풍요뿐아니라 그 깊이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없다. 재능이 풍부한 시인의 작품을 읽으며 얻게되는 기쁨과 기대가 크다.
김태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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